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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에는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마침 두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재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의 기든온이 아니라, 너희도 만일 해겠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도함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관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은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런 온이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다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어찌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이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여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는 유대나라가 로마에 속박 아래에 있었던 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아래에 있을 때, 일본의 속박 아래에 있을 때에 거기에서 독립하기를 원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때에 일본 사람들이 곳곳에서 한국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잡아서 죽인 역사를 우리가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청산이에서 독립군이 일본 군인을 무찌렀을 때에 그 다음에 일본 군인이 들어와 가지고 청산이와 그 뒤에 있던 고울 사람들을 박살했던 그러한 기록을 우리가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든지 로마로부터 우리가 자유해야 되겠다. 그리하여 로마를 대항해서 로마와 싸워보자 하는 그러한 모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갈릴리 지방에 살다가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전으로 재물을 바치러 올라왔을 때에 그때의 그것을 안 빌라도가 그들을 그곳에서 잡아 죽이고 그들의 피가 그들의 재물에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을 때 사람마다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들이 할릴리에서 이헤르살렘으로 올라왔다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피가 그 재물에 섞이게 됐다. 또한 예수님을 어떻게든지 모함하고 그를 넘어뜨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와가지고 이 얘기를 해줍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재물에 섞은 것을 당신 아십니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빌라도가 그렇게 한 건 참으로 잔인한 짓이고 그것은 인간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요구를 한다면 예수님을 아마 빌라도에게 고자질해서 이 사람은 당신이 죽인 그 사람들과 동료의 사람이요. 당신을 반역하고 있는 사람이요. 아마 그렇게 고소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그렇지 않냐고 그 빌라도의 편을 들어가지고 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니까 그렇게 죽일 수도 있겠지. 만일에 빌라도의 편을 들었다면 이 사람은 우리 나라에 대하여 충성할지 모르는 반역자라고 그를 아마 손가락지에 쓸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라도가 그 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든지 저렇게 말하든지 그 둘 다 대답하기가 어려운 그러한 문제를 그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그 사람들이 죽은 것은 어떠한 이유입니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죄가 많았길래 하나님을 숨긴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 자기들의 피가 재물에 섞여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일을 당했습니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입니까? 그들이 죄가 있었다면 어떠한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러한 것을 예수님께 물어본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을 해주십니다. 빌라도가 잘했다 못했다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죽은 사람들이 죄가 많았다 없었다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너희가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9.11 사태가 지나가고 나서 트윈빌딩에서 3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죽임을 당하였겠는가? 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하여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왜 죽었는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심되는 관심사가 아니고 우리의 관심사는 나의 상태는 어떠한가? 나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그 갈릴리 사람들이 죽은 것이 너희보다 더 죄가 있어서 죽은 줄 아느냐? 너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죽었다고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다니는 그것보다도 너 자신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고 대답해 주십니다. 그 갈릴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또한 실도한 망대에 무너져 튀어 죽은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그 사람들은 빌라도가 일부러 죽이려고 해서 죽인 사람이 아니고 우연히 사고가 나서 그 망대가 무너져서 그 아래 18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마도 그 실도한 곳에서 어떤 성결을 하게 하는 그러한 유대인들이 자기 몸을 깨끗하게 하는 그러한 결례를 행하다가 자기 몸을 깨끗게 하는 그러한 예를 행하는 그러한 가운데 있다가 무너져 죽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남보다 더 열심히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보겠다고 하는 그러한 자리에서 그 사고가 나서 죽었다면 그것은 웬일이냐.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은 것인 줄도 생각하느냐. 아니다. 너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너희 자신이 만일 너희도 회계체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할 줄 알아라 하는 것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지혜로운 대답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잠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사람들처럼, 갈릴리 사람들처럼 또는 신로한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18사람들처럼 우리 생활 가운데 생각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저희 가정에도 그러한 어려운 때가 있었던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갔지만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은 지금도 그때는 그 눈에 오늘처럼 그렇게 보여진 때가 있습니다. 그 4월달 제가 미국에서 여행을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는데 그때 아버님께서 거울 앞에 앉으셔서 이렇게 보시면서 여기에 뭐가 났는데 안 아프다. 기침을 좀 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전주에 있는 병원에 있는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님이 기침을 좀 하시고 여기에 뭐가 났는데 안 아프다 그래요. 그러니까 내려와 보라고 그래서 이제 아버님을 모시고 제가 둘이서 아버님과 모처럼 한번 즐거운 여행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삶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아버님하고 같이 가는 재미를 그때 느껴보았습니다. 그 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그 결과를 얘기를 안 해줘요. 그 얘기를 안 해주고 그냥 가서 기다리시면 말씀해 주겠다고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는 이제 폐암 말기였습니다. 이제 앞으로 길면 4개월, 3, 4개월 이상은 아마 지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 안에 세상은 어떠실 것입니다. 하는 그러한 진단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그러한 말이었습니다. 별로 몸이 아프신 적이 없었고, 강단을 비우신 적이 없었습니다. 매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하는, 그때도 계속 쉬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그러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 삶이 이제 한 4, 5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마지막. 태양 말기가 되었다 하는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에 정말 하늘이 깜깜하다 하는 것을 그때 느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같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기 위해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옆에서 잇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버님과 같이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덮치는 격이라고 하나요? 우리 한국에 있는 집에 이렇게 아버님이 누워계시는 방이 있으면 그 아래 아궁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온돌방을 띄우는데 거기를 보통 때는 이렇게 판자를 덮어가지고 보통 마루처럼 사용을 하다가 거기에 우리가 불 뗄 필요가 있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그 아래 사람이 들어가서 거기다가 이제 불을 띄우게 이렇게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열어놓은 것을 모르고 어머님이 그리로 빠지셨습니다. 빠지시면서 거기에 허리를 다쳐가지고 갈비뼈가 여러개가 또 풀려지셨습니다. 아버님은 이제 암으로 병 간호를 하고 계시고 또 어머님은 또 갈비뼈가 부러져가지고 움직이지도 잘 못하시고 그래서 저희 집에서는 두 분이 항상 집을 인도하시고 나가시던 분들인데 두 분이 다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암울한 때였습니다. 집안의 병과 고통과 괴로움과 그러한 것이 가득 찬 그러한 때를 그때 지나가 보았습니다. 참으로 아픈 때입니다. 괴로운 때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그러한 때가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생겨날 때에 이것이 왜 생겨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견뎌낼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떻게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것은 우리 생활 가운데 필요한 그러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찾아오는 이러한 비극들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비극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것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 삶에 크게 유익을 주는 교훈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누가 보금 13장에 나온 그 비극을 당한 이 사람들의 경우를 우리가 생각하면서 몇 가지로 우리 삶에 찾아오는 비극들에 대하여 어려움들에 대하여 그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잠시 같이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우리 삶에 찾아올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누가 보검 13장에 예수님께 와서 두 사람이 얘기한 것도 같은 얘기였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누구에게 책임이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재단 내 그 피를 섞은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거기에 누가 책임을 져야 됩니까? 누가 거기에 원인이 되고 있습니까? 그것을 그들이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 말씀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얘기한 대로 그들이 죽은 데에 대한 책임은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빌라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지만, 그러나 그 빌라도가 그 말씀을 어기고, 그가 그들을 죽이고 그 피를 흘렸습니다. 빌라도에게 우선 책임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를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왜 트윈타워가 무너졌는가? 거기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1차적인 책임은 그 트윈타워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자폭한 그 테러범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그들이 지는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실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각각 자기 한 일대로 하나님께 직접 고하는 날이 있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받을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그것이 빌라도의 책임이라고 우리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다음에 동안 생각하는 것은 혹시 그 사람들의 책임은 아니겠는가? 그 죽은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이러한 기극이 찾아오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말씀해 주시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가지고 그들이 죽은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트윈 타워에서 죽임을 당한 우리 사랑하는 그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무슨 죄가 우리보다 더 많아서 그러한 하나님의 조주를 받고 그곳에서 죽음을 당한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당하는 비극은 반드시 그것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죄가 더 많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하여 설명해 주실 때에 그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극의 그러면 책임은 그저 이러한 일을 일으키는 빌라도에게만 있는 것인가? 이것은 그저 우연히 그저 재수가 없어가지고 그 사람들이 그곳에 왔다가 거기에 잡혀가지고 죽은 것인가. 성경은 예수 그리스께서는 이곳에서 더 깊은 원인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은 빌라도가 죽였고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 재물에 섞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라고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계시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주님께서 뜻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참새의 한마디라도 땅에 거저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때에만 그 일이 일어나실 수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절대의 통치권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비극을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다니엘서 4장 35절 말씀을 보면 땅에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이루실 그러한 대권을 그가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0편 115편 3절에서도 말씀하는 것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0편 76편 10절 우리가 그동안도 여러 번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진실로 사람의 노는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가지고 그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오. 창차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오. 빌라도가 행한 그러한 논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남은 논은 주께서 금하시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하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왜 허락하셨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일들을 우리 주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실 의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아는 것은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날 때에 그것을 다수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는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는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이러한 모든 것을 다수이시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 책임의 그 한 곳을 더 찾아본다면은 6절부터 9절에서 우리가 그 책임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매 없는 삶 가운데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곧 이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데 무화과 나무가 보통 열매가 열리려면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서 그 무화과 나무를 심은 주인이 찾아왔습니다. 과수원을 지키는 그 사람에게 여기에 무화과 나무를 심고 3년 동안 개안을 주어서 열매가 맺도록 했는데 아무 열매가 없지 않느냐? 뭐 하려고 땅만 버리느냐? 찍어서 버리라. 그때 그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이 그에게 얘기하기를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걸음을 줄이니 그 후에 만일 수화가 열리면 그 주인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으니 그 나무를 둘 것이군요.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찍어버리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는 그러한 간구하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대하여 그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고 그 은혜를 허비하였을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찍어버리는 그러한 역사가 있다. 그것이 비극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수가 있다고 여기에서 경고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를 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부어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당시에 있는 유대의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아마 하신 말씀인 줄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냈지만은 그 아들을 너희가 영접하지 않고 계속 거부한다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3년 그 사역을 하시고 그것을 너희가 계속 그 사역 가운데 믿지 않고 베쳐간다면은 그 후에 너희에게 올 심판을 너희가 주의하라고 하시는 그러한 말씀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직접적으로는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신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교훈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었을 때에 이것을 계속 거부하고, 계속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그것에 따르는 책임을 물으시는 날이 있을 수가 있다. 너희에게 그 비극의 책임이 있을 수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비극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 비극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그러한 사람이나 어떠한 그 병이나 마귀에게 그 책임이 먼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모든 것을 하시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모든 것을 또한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이 그러한 비극을 우리 삶 가운데 불러올 수가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은 이러한 비극은 누구에게 찾아오는가 하는 것이 그 다음에 우리가 묻는 질문입니다. 어떤 자들에게 이러한 비극이 찾아오는가 여기에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이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없어가지고 아직 살아남아 있는 줄 아느냐? 너에게 이런 돈이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계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가 어떠한 기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에 그것을 얘기하기는 좋아합니다. 야! 어제도 에어쇼 하다가 그 팬텀2 비행기가 떨어져가지고 그 두 사람, 그 비행사가 죽었다. 우리가 쉽게 얘기합니다. 남의 일기에 쉽게 얘기합니다. 그런 희극은 나의 삶 가운데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누구에게나, 누구에게나 젊고 늙고 아름답고 자기 생각에 좀 미워 보이고 하는 그런 것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우리가 사람이라면 비극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다고 주의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이 비극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고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성경은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디 5장 7절 말씀 그동안에도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낳나니 불티가 위로 나름 같으니라 불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고 비극적인 일을 경험하는 것은 그것은 당연히 삶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를 잘 섬기고 그와 가까이 가면 우리 삶에 고난이 없을까?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봅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아가던 제자들에게 큰 풍당이 일어나고 그들이 거의 죽게 되었던 그러한 고통을 그들이 겪었던 것을 우리가 마가복음 4장 37절에서 지난 수요일에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이 비극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찾아올 수가 있고 저에게 다시금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특별히 이러한 비극이 찾아올 수가 있는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회개함을 알지 못하고 계속 범죄하며 고집하며 나가는 사람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저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있기에 아직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하는 기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 기간이 유예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까지는 예수 그리소를 믿고 의로움을 잇기까지는 그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회개해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예수 그리소를 믿어 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기에 여러분에게 오늘 잠시 시간이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찍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 기다리고 있지만 그 자리는 위험한 자리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누구에게 비극이 찾아올 수가 있는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특별히 열매 없는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도끼가 나뭇구리에 놓인 것을 알으라고 여기에서 경고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이러한 비극이 찾아올 수 있다면 이러한 것을 우리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이러한 것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가 있다면 이것을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마땅히,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가질 태도가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먼저 우리와 하나님의 거기에 갈라진 것을 그것을 잘 보수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에서 너희가 그러한 사고에 대하여 그러한 비극에 대하여 남의 일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보다는 너희 자신이 이러한 비극에 대하여 준비하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이러한 모든 비극에 대하여 준비하는 삶입니다.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홀고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생활 가운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비극을 예비하는 길이라고 먼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내가 내 삶 가운데서 나는 매일매일 회개하는 생활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는데 내가 이제 천국의 문 앞에 이른 그 순간까지 나는 나의 회개하는 삶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한 사람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튜 헨리라고 하는 성경 주석가의 아버지가 되는 필립 헨리라고 하는 사람이 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회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생각에 대하여 그것이 별로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는 내가 만일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다면 회개하라는 말씀을 전하다가 죽기를 원하고, 만일에 내가 강단 밖에서 죽게 된다면 내가 회개하는 자리에서 듣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우리 삶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이러한 교약들에 대하여 회개하며 그 계산할 것이 짧을수록 계산을 정확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빚이 길어지고 빚이 많아지면 빚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다 찾아오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또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 나가 가지고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이 일을 다시금 잘 해결해 보려고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설명해 주기를 당신 세터를, 닥터를 가서 많이 좀 얻어오시오. 그래서 닥터를 많이 얻어왔습니다. 그 다음엔 당신 가면서 길에다가 닥터를 이렇게 뿌리면서 가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닥터를 쭉 뿌리고 갔다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이제 가서 닥터를 하나씩 다 주워가지고 오시오. 그러나 그때 가서 닥터를 주우려고 보니까 이미 다 바람에 불려가고 몇 개밖에는 찾아올 수가 없었다 하는 이러한 얘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오늘 이 말씀으로도 우리가 이것을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털이 떨어졌을 때 그것을 찾아서 죽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사방에 흘려놓고 다닐 때 회개하는 것도 어려운 그러한 자리로 우리가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해 주십니다.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야 회개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매일 삶 가운데 추수면서 사는 삶,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비극을 어떻게 준비하면서 살 것인가?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해 주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러한 일에 대하여 충성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있는 삶을 살으라고 말씀해 주시고 오겠습니다. 그것이 그 다음에 비우가 주는 말씀입니다. 무화과 나무라면 3년이 지나면 마땅히 열매가 있어야 되고 열매가 있었을 때 그 나무는 그 자리에 박혀있을 그러한 차격이 있고 그 주인이 와서 함부로 거기에 도끼를 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심히 위태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고 주의해 주시고 계십니다. 좋은 땅에 열매 있는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삶, 비극적인 그러한 일에 대한 준비하는 삶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이러한 비극을 우리가 어떻게 대비하면서 예비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는가,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 과원지기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과원지기가 얘기하는 것은,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그 기회를 잘 불러 파고, 거기에 걸음을 주고, 그를 위해서 일해 보겠습니다. 이 과원지기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지 못할 때에 이 시간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기다립시다. 조금 기회를 더 줍시다. 저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고 열매가 있을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합시다. 그러한 예수 크리스도의 강도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위를 둘러 파고 거기에 걸음을 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열매 없는 자들을 위하여서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 파고 걸음을 주고 하는 이러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서로서로가 서로를 보아돌아보아 믿음에 떨어진 자가 있는가? 주의하여 그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서로서로 깨어있을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를 이끌어가는 생활 그것이 우리가 우리 삶에 다가오는 그러한 비극을 서로 준비해주며 예비해주는 삶이라고 주님께서 이곳에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예비하였던지 예비하지 못하였던지 비극은 우리에게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왔을 때에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비극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준비해 나왔는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엘리 위젤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람이 쓴 글을 한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유태인으로서 그 유태인이 대학살 당할 때 거기에서 자기 어머니가 자기의 사랑하는 누이가 무참하게 고문을 받고 거기에서 처참하게 죄로 변해나가는 것을 그가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이러한 고통을 맛보고 그러한 비극을 눈앞에 보고 나서 그가 얘기하는 것은 나는 그것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내 일생에 내가 하나님 이상으로 오래 살도록 그러한 내 명이 길어질지라도 나는 결코 그날을 잊을 수가 없겠다. 그날 하나님도 죽었고 믿음도 죽었고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떠나갔고 하나님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있었다면 그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러한데 그러한 것을 놔두는 하나님이라면 그가 과연 하나님일 수가 있겠는가?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믿지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먹을 휘두르며 참으로 분노하며 고통 가운데에서 미움 가운데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삶을 이제 그 미움과 분노와 자포자기와 좌절과 이러한 걸로 바꾸고 그러한 비극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더욱 비극적인 그러한 삶으로 그를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다음에는 자포자기하고 실망하는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가 주위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전번 날 보니까 미국 사람들이 록앤롤의 왕이라고 하는 앨비스 프레슬리의 삶에 대하여 보여주는 것을 한번 잠시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젊었을 때에는 가끔 복음 송도 부르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amazing grace 뭐 이런 것도 부르고 이제 교회도 다니고 하던 그러한 그 복음에 대하여 조금은 들은 바가 있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원하던 것은 그 사람이 찾던 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헐리우드에서 영화 배우로서 성공해보겠다. 그것이 그 사람의 꿈이고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을 향하여 있는 것을 다 투자해보았습니다. 그 처음에 그가 폭발적인 인기를 가지고 성공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먹어가면서 그가 만든 영화들이 실패하고 그가 만든 역들이 점점 시시해집니다. 그때 그가 실망을 합니다. 자기 삶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 점점 실망하면서. 그리하여 너무 신경이 쓰니까 신경안정제를 먹습니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니까 또 이제 두통이 심하고 하니까 그 다음엔 두통약을 먹습니다. 두통약을 먹고 그러고 하니까 그 다음엔 장이 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잠오는 약을 먹습니다. 계속해서 약을 먹습니다. 그 의사가 지어지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약들을 그러나 자기가 유명한 그러한 것을 빌어가지고 그 당시에 미국 대통령 관저에 가고 하는 관계로 그 약을 단속하는 그러한 단속원의 그 배지를 얻어가지고 그것을 가지고서는 그 약국을 다니면서 그 약에 대한 단속을 하는 것처럼 그 약을 갖다가 모아가지고서는 그 약을 마구 먹다가 결국은 그 약물 중독으로 그 세상을 그가 40대 초반에 떠났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의 어려움이 왔을 때에 자기 삶의 고난이 왔을 때에 그것을 잊어보겠다고 이러한 마약이나 마시는 것이나 어떠한 세상을 도피하는 이러한 것을 통해 가지고 점점 자기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더 나은 그러한 비극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성경 가운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욕계에서 우리가 그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욕의 고난을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러한 고난이 올 수가 있는가?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자녀들을 잘 단속하며 그들이 죄짓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재물을 사랑하지 않냐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물이 다 사라지고, 그의 자녀들이 다 섭시간에 죽임을 당하고, 그의 건강이 그에게서 떠나고, 자기를 사랑하던 부인까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는 그러한 자리로 그가 떨어졌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고통 가운데에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내쥐면 그가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았다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를 향하여 주먹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에이 다 잊어버리자 여러가지 마약 가운데에서 그가 그 스스로 죽음을 더 자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찾았던 길은 그러한 길이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그가 바라보았던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가 그 고통을 견뎌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러한 고난이 옵니까? 여러 가지로 그가 질문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나님 너무 괴롭습니다. 한탄해보기도 합니다. 차라리 나를 낳지 말게 해주셨으면 좋을 것을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셔서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너를 고난 가운데 두는 그 뜻을 네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느냐? 내가 땅에 기초를 놓을 때, 내가 세상을 만들 때 그때 네가 거기 있어 가지고 내가 어떻게 만들라고 네가 그때 훈수할 수 있었느냐? 내가 하늘에 별들을 만들어 가지고 하늘에 별을 흩어 놓을 때에 그때 그것이 어느 자리에 박혀 있으라고 네가 나에게 가르쳐 주고 그것을 하나라도 거둘어 줄 수가 있었느냐. 바다를 내가 만들고 바닷물이 이 선으로 더 이상 넘어가지 말라고 내가 명령할 때에 그때 내가 그 한계를 나와 같이 걷고 내가 도와줄 수가 있었느냐.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은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욕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에 그의 비극이 오히려 그의 놀라운 축복으로 변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비극은 그로하여금 모든 비극을 당하는 사람을 향한 등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좌초될 뻔하다가 욕의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지혜로운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러한 호난의 풍판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목격한 곳까지 걸어가는 그러한 빛의 역할을 오늘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비극이 찾아왔을 때에 그때의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것이 지혜로운 시간입니다. 지금도 기억을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동안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알게 된 그러한 은혜를 언제 가질 수가 있었는가? 하늘나라가 그저 성경에 나오는 그러한 얘기가 아니고 정말 내가 가야 되는 곳이고 나의 사랑하는 부모가 가 있는 곳이고 그것을 내가 언제 만져보게 되었는가? 우리 아버지가 병으로 이 세상에서 점점 떠나갈 때, 이 세상이 점점 그에게서 적어지고 하늘이 점점 가까워질 때에 그때 그것을 만져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느껴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또 그 같이 아버님과 같이 뼈가 부러져가지고 그 갈비뼈가 부러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같이 두 분이 누워있을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의지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경험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그때 전혀 느껴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고함치는 그러한 고함치는 말씀을 우리가 경험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드럽게 속삭이듯이 말씀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우리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왔을 때 그때 하나님은 이러한 마이크를 통해서, 확성기를 통해 가지고 고함치듯이 내가 여기 있다고, 내가 다스린다고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때라고 설명한 그러한 글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여러분이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이 고통 가운데 오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욱 크게 말씀하시고 있는 순간입니다.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지하는 것이 비극을 맞는 사람들의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건하게 줍니다. 더 쓰모있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 맡은 일이 여러 공장을 다니면서 그 공장에서 만드는 물품들을 어떻게 국산화할 수 있는가 그것을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련소를 여러 군데 많이 가보았습니다. 그저 쓰레기 같은 것이 잔뜩 마당에 쌓였습니다. 산더미처럼 쓰레기 같이 쌓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용광로에 집어넣습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그것이 이제 뜨거운 시연을 받고 나면 그 다음에 그 아래에 붉은 거기에 그 쇠가 흘러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주형에 따라가지고 찍어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비싼 돈을 주고야 살 수 있는 값있는 그런 물건들이 거기에서 찍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야구보수 1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고통이 어떻게 기쁠 수가 있는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압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굽이하여 조금 더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미라. 우리에게 시련이 왔을 때에 그 시련을 믿음으로 참고 견뎠을 때에 우리는 더욱 온전하고 굽이하여 부족함이 없게 쓸만한 그러한 그릇으로 나올 수가 있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페드로 전서 4장 12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실현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고 그것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것은 그 고난의 다른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을 회개하는 생활 가운데, 주님과 가까운 생활 가운데, 열매 매는 생활 가운데 준비하였다가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믿음 가운데에서 점금같이 나와서 하나님의 손에 귀하게 사용되는 그러한 그릇들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 삶의 고난이 올 때에 아무도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괴롭고 슬픈 것이며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지만은 그러나 그러한 고난 뒤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며 전명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으며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저희가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순 없지만은 그를 믿게 하여주시고 그를 의지할 수 있게 하여주시고 우리에게 당하는 모든 고난을 통하여 더욱 온전하여지고 더욱 굽이 되고 더욱 주의일에 소용될 수 있는 그러한 복된 자리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When tragedies knock on you. (Korean)
讲道编号 | 42202184813 |
期间 | 47:23 |
日期 | |
类别 | 周日 - 下午 |
圣经文本 | 聖路加傳福音之書 13:1-9 |
语言 | 韩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