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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마지막 30구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마지막 30구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수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심에 우리가 마음의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찬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시니는 믿붓이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의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패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원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발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느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압니라. 그러므로 너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리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야마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아멘.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잠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오늘도 저희가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이 복된 자리로 초청하시고 또 이끌어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의 마음과 또 저희의 생각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으로 끝마치지 않이하게 하시고,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가 새겨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말씀이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이 약속을 따라서 날마다 우리의 삶의 능력과 또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을 믿음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일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자가, 심히 부족한 자가 단해서 싸우니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냥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진리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입술과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원하올 때에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히브리스는 10장에 와서 4장부터 논정을 시작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사역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10장 19절부터 마지막 39절까지는 이 전반부의 전체의 교훈의 결론 부분에 해당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히브리저는 길게 여러 장에 걸쳐서 주예수 그리스의 대제사장의 사역을 논증한 이후에 그 진리를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는데요. 크게 두 가지를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제 너희가 주예수 그리스의 대제사장의 사역의 은혜를 힘입은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산길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라는 그러한 적용이었습니다. 새로운 산길로 나아가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적용은 이제 너희가 주 예수 그리스의 은혜를 심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야마 살아야 한다는 그러한 적용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그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는데요. 그 이유는 그날이 가깝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날, 그리스의 재림의 날, 이 세상의 종말 아니면 우리의 개인의 종말이 매우 가깝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의 은혜를 심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믿음으로 말미야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0장, 25절, 37절에 재림의 급박성을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모의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37절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리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 두 번째 조경은 4장부터 10장까지의 교훈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이제 11장부터 마지막 13장까지의 믿음이라고 하는 주제를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합니다.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10장 마지막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히브리서가 강조하고 나서 이제 11장에는 뭡니까? 11장은 믿음의 장이죠. 그래서 믿음의 영웅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정반부의 교훈과 마지막 결론 부분 11장에서 13장을 연결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히브리서 정반부 교훈의 두 번째 적용인 믿음으로 말미야마 살해한다는 진리를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렇게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개념을 아는 것 같기는 한데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아마 공통적인 성도들의 생각이 텐데요. 저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히브리서 10장을 중심으로 해서 네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23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또 약속하시니는 믿붙이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이게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 이 개념이 이렇게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데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조금 어려운 그런 구절들 대하실 때에 그 성경을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을 드리면 영어성경을 같이 한번 읽어보시는 겁니다. NIV도 좋고 킹제임스도 좋고 여러 성경들을 읽고 또 그것이 어떤 분들에겐 영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세번역 성경이라든지 쉬운 성경이라든지 현대인의 성경이라든지 이런 성경들을 읽어보면 그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NIV는 Compassion of Faith라고 믿음의 고백이라고 이 부분을 해석하고 있고 킹제임스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NIV는 The Hope We Propose라는 단어를 통해서 NIV는 소망이라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킹제임스는 믿음이라는 데에 소망을 두고 있죠. 그런데 개혁성경은 두 가지를 다 놓치지 않습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도 들어있고 소망이라는 것도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든든하게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돌이다. 믿는 돌이다. 킹제임스에서 얘기하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요.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고백. 조금 더 넓게 생각한다면 교회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경의 진리들, 복음 진리를 말하는 것이죠. 이 신앙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으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만일 우리가 어떤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의심한다면 또 그것을 그 믿음에서 흔들린다면 그것은 굳게 잡고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설령, 핍박과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보금의 진리를 흔들리지 말고 굳게 잡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스 6장에서 복음 진리를 배우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죠.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의 도를 배우는 일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들, 장성한 사람들이 되어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육장에서 히브리서가 책만 한 대로 저지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다면 어린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든든히 붙잡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의 홍수가 전국의 강타에서 많은 수제민들이 나는 것을 보면서 뉴스에 줄을 타고 이렇게 강을 건너는 한 장면이 이렇게 인상적으로 저에게 보여졌는데요. 강을 건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든든히 잡을 수 있습니까? 못하죠. 정말 강건한 성인 남자들이 아니면 그 줄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의 도의 기초를 벗어나서 보금의 진리를 아는 데 있어서 성숙한 사람들, 장성한 사람들이 될 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경건해, 훈련해, 힘써야 되는데요.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단아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요한이 천사가 하나님의 게시가 기록된 두루마리를 받아서 먹었는데 그시 입에서는 꿀처럼 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우는 일은 꿀처럼 달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것을 다 경험하지는 못할지라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 나아가면서 이것을 경험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꿀처럼 단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꿀처럼 단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성경 읽기를 더 매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읽고 묵상하는 그것이 꿀처럼, 입에 꿀처럼 닿은 그런 은혜의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보면,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지식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동적으로 말씀을 따라 살지는 못하는 거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그것은 쓴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알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경건하게 사는 자는 고난이 더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고난 가운데서도 말씀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만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손해를 당할 것입니다. 불이한 사회에서 나만 정의롭게 산다면 왕따가 될 것이고 남보다 승진하는 데 있어서도 뒤쳐질 것이고 때로는 부정직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에서는 쓰다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먹을 뿐만 아니라 배에서 쓴 것을 경험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서 그것이 비록 쓴 것이지만 담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빼놓아선 안 될 것입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성도의 고원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이다 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영원히 완전한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셨지만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온전히 거룩한 상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우리는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리스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몸도 영화가 되는 그러한 순간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진리를 덧붙이는데요. 23절입니다. 히브레소 10장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믿붓이니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우리의 영국적인 상태가 이미 완전한 상태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그것을 향하여서 우리는 날마다 진행되어 나아가고 있는데 아직 남아있는 실제적인 이 성화가 완전하게 영원히 거룩하게 하실 그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그 소망을 붙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설명을 덧붙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라 어찌 그 말씀하신 말을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우리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쓰며 사는 것입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24절과 25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세상의 풍조를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점점 더 영적인 일들에는 흥미를 잃어가게 되고 사람들은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영생에 대한 관심, 내세에 대한 관심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이었던 시대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죠. 사람들은 먹고 살 또는 경제적인 그런 문제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 시대는 살았고 그 방식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쳤고 카톨릭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많은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으로 신랄한 논쟁과 싸움이 있었던 그런 시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면 갈수록 영적인 것들은 경시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정부임량 살아가는 그러한 풍조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히브리스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교회, 이 지상에 있는 교회도 세상의 풍조에 함께 휩쓸리기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인 게으름과 영적인 나태함이 우리 속에 자리 잡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 모이기를 심수라라고 하는 이 말씀은 이러한 세상의 풍조, 영적인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의 그 풍조를 거슬러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입니까? 물론 이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어려운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바이러스로 인해서 물리적으로 모이기 어려운 그런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적용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 개인 각자가 적용해 보시기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지 말고 나에게 나의 마음을 살피는데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는 영적인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영적인 일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내 삶의 우선순위에는 영적인 일들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예수님께서 의원 모음 6장 27절에 말씀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모의기를 힘쓰라. 영적인 일들을 게을리하는 사람들의 습관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또한 지나간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건 이전의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그때의 영적인 일들에 힘쓰는, 모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었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이러한 권면을 주면서요, 마지막에 이것을, 이러한 진리를 덧붙입니다.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갑자기 온 세상을, 세상의 환경을 바꿔버린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순식간에 갑자기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종말이 순식간에 갑자기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삶의 초점을 믿음에 맞추고 영적인 일들에 맞추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경고를 흘려듣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 매우 위태로운 그러한 상황 가운데 서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10장 38절에 이렇게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성도의 영적인 퇴보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건한 일들을 등한시하는 풍조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하나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지역교회입니다. 24절 상반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왜 우리가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까? 왜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풍조에 떠밀려 갈 것입니다. 물살이 센 강물을 건너신 분들이라면 혼자서는 절대 물살이 센 강물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인간 띠를 만들어서 길게 띠를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고 그렇게 인간 사슬을 만들어서 간다면 물론 그래도 미끄러지고 휩쓸려 가지만 그러나 인간 사슬이 잡아주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고 그래서 결국에는 그 강을 모두가 다 건너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교회가 왜 모의기를 심써야 합니까? 서로를 돌아보기 위해서 사람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 모의기를 심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마지막 날 주 예수 그리소께서 혼인잔치를 백포시는 그 자리에 우리 옆에서 함께 예비했던 모든 우리 성도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여서 즐거움을 누리며 실학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 서로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과 선행을 통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누군가는 실족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입니다. 근데 24절의 본문의 관점은 우리가 교회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교회는 나의 가족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요. 내가, 나의 가족이 지역 교회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도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은 대부분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가끔 교회 안내를 문의하는 분들이 있어요. 주연학교 시스템은 얼마나 잘 되어 있고 어떤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까?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셔요. 저는 그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그것을 먼저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어떠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박준수를 졸업하든 우리 교회를 출석했다가 이렇게 직장을 얻어서 떠나가는 친구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어요. 같이 식사하면서 큰 교회 가서 2, 3년 동안 잘 배워라. 우리 교회가 제공해 주지 못했던 많은 좋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라. 필사적으로 잘 배우고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신실하지만 작은 교회로 가라. 가면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저는 제가 만나서 식사하는 친구들에게 빼놓지 않고 본면을 주는 그런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관점으로 우리 교회를 봐야 합니다. 이 교회는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어떤 영적인 혜택을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가? 그거 이전에 나는 이 교회에 어떻게 봉사하고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시각을 바꿔서 교회를 바라보라고 히브리사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세 번째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영적인 퇴보의 비참한 결과를 깊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퇴보의 무서운 결과를, 비참한 결과를 깊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스 10장에는 생각하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요. 첫 번째 생각할 것은 영적인 퇴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나타나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26절과 29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지 않은 제사가 없고 29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원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우리는 히브리서를 한 장씩 한 장씩 생각해오면서 히브리서에 나타난 그 경고들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2장 1절에 흘러 떠내려갈까 주의하라는 경고를 생각해 보았고요. 4장 1절에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있을지라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는 그러한 경고를 생각해 보았고 5장 11절에는 듣는 것이 드남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스의 도에 초보에 머무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경고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10장에 와서 발견하게 됩니다. 10장의 경고는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영어 성경에는 willfully, sin willfully, 의도적으로 범죄한다면. 그리고 NIB에서는 keep on sinning이라고 해서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인데, 킹제임스에서는 의도적으로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NIB에서는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것. 그것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상태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이슨 범죄한 이후에 10편 51편에서 의도적으로 범한 죄에 대한 속죄 제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요, 의도적으로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을 위한 속죄 제사는 없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매달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다이슨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이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한국에 그 구원파라는 사람들이 있죠. 히브리스 10장을 읽어보면 그 교리가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진 교리인가를 우리는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범죄하는 자들을 위한 재산은 없습니다. 그들을 위한 속죄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게 되는데 여러분,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 20구절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여러분 감히 북한에서는 수혜가 났는데 김정일 그런 통치자들 있지 않습니까 김일성 그런 초상화들을 집에다 걸어놓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에 따라서 충성심을 테스트하고 했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었는데요. 참 어이가 없습니다. 콩수가 나서 떠나려 가게 되는데 초상화를 들고 나갈 정도로 그런데 여러분 여기 지금 휘부리사가 쓰는 단어는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일이다. 원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여러분 저는 지난 시간에 제가 설교하면서 아마 가장 오래 들어서 길게 설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할 얘기를 다 하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길기는 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사역에 그 효력 아래, 그 은혜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의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히브리서는 이제 10장 19절부터 쭉 서술하지 않습니까? 정말 영광스러운 특권들 복된 자리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강조하며 그렇게 성도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공무시켰는데 그가 앞에서 강조했던 그 모든 특권과 축복의 자리를 강조했던 말이 무색해질 만큼 더 강한 어조로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죄를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라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범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날마다 깊이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날마다 선악의 갈림길에서 운명처럼 죄를 선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우리가 넘어지고 그래서 실패할 때가 많이 있지만 우리는 운명처럼 죄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죄가 아닌 의의를 택하고 사랑과 선행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마지막으로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로 싸우는 자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로 싸우는 자들을 본받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하라는 단어를 제가 본받는다라고 바꾼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인데 결국 그들을 본받는다라는 것입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전달의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낸 것을 생각하라. 이 불에서 십장의 수신자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엿보게 해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고난의 큰 싸움 고난의 큰 싸움에 직면했던 사람들입니다. 보금의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고난의 큰 싸움을 싸워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스 10장에는 그들의 고난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 그런 근거가 있는데요. 34절입니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산업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산업을, 자신의 재산을 다 빼앗기기도 했는데 그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피부를 저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 법에는 국가에 반역 행위를 하는 중대 범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의 반역 행위를 저지른 중범죄자들로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가 다 빼앗아갑니다. 어느 날 내 뱅크가 다 크로즈 됩니다. 브로즈 됩니다. 그래서 한 푼도 찾을 수가 없고 내 집인데 내가 타고 다녔던 찬데 다 빼앗아갑니다. 아무것도 남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스의 수신자들이 경험했던 고난의 큰 싸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을 기쁘게 당했다고 힘을 써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쁘게 여러분 어떻게 이것을 기쁘게 여길 수 있습니까? 내 평생 읽어놓은 삶의 터전을 다 빼앗기는데 우리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아니, 그 이상 노력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 그래서 신분 문제와 또 사업터와 직장을 다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그것을 다 빼앗기고 미국 당에서 추방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기쁘게 당했다고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냥 우리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표호가 아니라 믿음의 싸움과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로 싸운 사람들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어떻게 그들이 이런 고난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는지를 34절 하반절에서 설명합니다. 더 낫고 연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미라. 제가 이 네 가지를 말씀하면서 가장 첫 번째 믿는 도리의 교훈을 굳게 붙잡아라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히브리스의 수신자들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들었던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손해를 당하고 세상 물질은 다 빼앗겼지만 보금의 적대적인 국가가, 보금의 적대적인 세력이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것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은 그들이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의 생명은 때로는 사자밥에 던져지는 비참한 신세가 될지라도 영원한 생명은 꽤 아끼지 않는다라고 하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건히 붙들고 모든 자신이 쌓아오는 그 인생의 그 결과물들이 한순간에 허물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기쁘게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본받고 믿음의 담대함과 인내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히브리스는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은혜와 능력을 베푸셔서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흑인의서를 10장까지 살펴보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정의 사역의 탁월함을 깨달았거든. 새롭고 산 길로 하나님의 임지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그 견문, 그 본명과 나의 의이는 믿음으로 말미야마 살아야 한다는 이 교훈을 우리가 붙들며 우리의 남은 삶들을 그렇게 살아가도록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흔적들이 있게 하시고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믿음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도전 받을만한 믿음의 사람들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그림들 독립장로교의 선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여 주실 때에 믿음에 견고하게 서게 하시고 그래서 마지막 날 주 예수 그리스의 혼인잔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희락을 누리며 서로 즐거워하는 그 복된 자리에 다 참여할 수 있도록 자별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 세상에 모이기를 패하는 이러한 풍조에 흘러 떠내려가고 있는 자들이 있거든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송도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권명과 경고를 받게 하시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한 사람도 실족되는 자가 없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크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rmon ID | 818202010492740 |
Duration | 48:39 |
Date | |
Category | Sunday Service |
Bible Text | Hebrews 10 |
Language | Kor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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