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00:00
00:01
Transcript
1/0
누가복음 12장 13절말씀 무리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삶과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에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며,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대,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 거 하고 또 가로대,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곶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일러대,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하대.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내 예비한 것이 네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는 오니, 너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신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기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그런 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니냐? 백화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신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갖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에 돈 지우는 틀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예쁘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려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리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족도 가까이 아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22절 말씀을 보면은,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먹고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이고, 이 말씀에 대하여서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안 그러한가, 거기에 대하여 우리가 물을 만한 그러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만일 이렇다면, 만일 저렇다면, 설명 없이 이것은 그저 무조건 너희가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읽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나 제가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경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지키기 가장 어려운 크리스도의 명령이 있다면 그 중에 이것이 하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생활 가운데 염려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생활 가운데 큰 염려 가운데 지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에 여기 그린빌에 내려왔을 때 모든 것이 얽히는 것 같고 도저히 이제 앞으로 나갈 길이 없을 것 같을 때 큰 산이 머리를 찌누른 것 같은 그러한 무거움을 느껴보았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를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때 분명히 어느 모로 보아도 염려함이 없었다고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이 길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은 있지만 약속과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전혀 방향이 다르고 가는 길은 완전히 막힌 것 같고 나의 길은 이제 망하는 길 직전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때 우리가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대로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곳에서 분명히 말씀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내가 어떻게 나의 염려를 놓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 특별히 9.11 사태가 있었던 그 후에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아니 전 세계에 사는 어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염려 없이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이곳 저곳에서 가문의 소식이 끊임없습니다. 신문만 열면 아이비엠에서 몇천 명, GE에서 몇천 명, 무슨 포드 회사에서도 몇천 명, 인텔에서 몇천 명, 뭐 큰 미국의 회사에서 주로 천명 단위로, 만명 단위로 이러한 직업을 이뤘다 하는 그러한 소식을 우리가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대로 염려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전보다 훨씬 매상이 적어지고 이 사업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는 우리 생활 가운데 우리가 나이가 점점 먹어갈수록 나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우리에게 당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이러한 불가능해 보이는 나의 삶 가운데 나의 직장이나 나의 사업이나 나의 학교 생활이나 또는 나의 재정적인 문제나 나의 건강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 수가 있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기에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기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참이고 진리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무엇이든지 순종할 수 있다고 우리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주님의 위치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조화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 말씀을 놓고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명령,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갈 일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이 말씀, 우리가 과연 그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또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문제가 있길래 우리에게 그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여기에서 어떻게 노연할 수가 있을까? 하는 그러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오늘 여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가운데서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이곳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갈 삶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적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염려의 문제는 우리 주위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문제라고 먼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쭉 그제 읽어볼 때 25절 말씀을 보면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피를 한 잔 더 할 수 있느냐 너무도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키가 적은 분이 계신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키가 조금, 한 자는 그만두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한 치만이라도 더 크게 될 수가 있을까. 염려한다고 해가지고 그 키가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키 하나도 마음대로 느리고 줄일 수가 없다면 너희가 어찌하여 염려하느냐? 너희의 삶을 규장하시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인 것을 어찌 잊어버리고 사느냐? 먼저 염려하는 사람은 우리 생활 가운데 염려가 들어올 때 먼저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은 나의 믿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지시고 계시는데 나의 코의 호흡을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염려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사랑하는 자매님께서 어떠한 집을 매매하는 그 자리가 있어서 가보았습니다. 그 새로운 집을 매매하는 자리에 갔는데 그 매매하는 분하고 얘기하면서 지어가지고 파시는 분들이요? 하고 물어보니까 거기 있는 여자분이 대답을 합니다. 아니요, 이 집은 내가 살라고 우리 남편하고 같이 지었던 집이요. 근데 우리 남편이 44살인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서 집은 다 지었지만 이제 거기에 나 혼자 들어가 살기는 뭐하고 그래서 이 집을 팔기로 내놨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얼마 전에 들어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분이 얼마나 그 집을 지으면서 염려했겠습니까? 이거 속수는 제대로 와서 할 것인가? 자기가 손수 지었습니다. 그분이 아마 그러한 데 좀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땅을 사고 그 집을 이제 지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그분이 여러 가지로 염려를 했겠습니까? 그 집이 잘 지어질 수 있게 해서. 그러나 그 염려는 한 번도 자기가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집에 살아보지 못하고 그 삶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염려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느냐 왜 그 시간 염려하고 그 삶을 지나가고 있었느냐고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얼마 전에도 여러분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그린빌의 좋은 땅이라면 이 로퍼마운팅과 로렌스로드와 헤이우드로드에 있는 버드블루바드가 있는 그쪽 거기 정말 황금알같은 그러한 땅입니다. 원에이커에 최소한 100만불 이상씩 하는 그러한 땅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땅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저 계속 사들였습니다. 팔지는 않고 이 사람은 땅을 사면 리즌을 하여도 절대 팔지는 않고 그저 일생동안 그 땅을 사 모았습니다. 폴링스 워터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 그 사람은 자기의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공장 뒤에 치월러 하나 갖다 놓고 거기에서 생활하면서 자기의 딸이 있지만 딸과의 관계도 서먹하여서 그가 장례식 때 그 딸이 찾아갔는지 그것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 가운데 딸에게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하는 그러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저 많은 것을 모았습니다. 많은 것을 모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남겨놓았을까? 그가 남겨놓은 재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모든 것을 남겨놓고 갔습니다. 한 푼도 가지고 가지 않고 모든 것을 남겨놓고 갔습니다. 최소한 300밀리언 이상의 되는 그러한 재산을 그가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모았습니다. 싸놓았습니다. 재물을 잔뜩 싸서 모아두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읽은 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야, 네가 이렇게 잔뜩 모아놓았지만은 염려하면서 그것을 힘써서 모으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은, 그러나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보러 찾으리니, 그러면 내가 염려하며 예비한 모든 것이 네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그저 염려 가운데 내가 모으는 것을 위하여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 염려함은 너의 삶이 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내가 한 시간 더 살고 싶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생명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깨달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느냐 염려의 원인을 먼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다음 또한 염려는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고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염려하는 목숨, 우리가 입을 것이 없을까 염려하는 이 몸, 이것이 음식보다 중하고 의복보다 중하지 않느냐. 그것을 내려가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까마귀를 보아라. 신지도 아니하고 거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세상에 그 많은 까마귀들이 우리 집에 오면 기분이 나쁩니다. 우리는 까마귀를 생각할 때 그저 까마귀가 집에 오면 집에 흉사가 있다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있기에 기분 나쁩니다. 저거 좀 없으면 좋겠다. 주위 나가라 나가라. 우리는 그거 보기도 싫고 집에 가까이 오는 거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거 한 마리 날아다니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르시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가 오늘 무엇을 먹어야 될지, 어떻게 그 털이 얼마나 나아야 될지 계산하시고 필요한 대로 그에게 공급해 주시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들에 있는 백합파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말하느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갖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에 던지우는 틀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을 세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의 필요에 대하여서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믿지를 못하느냐? 우리의 염려의 문제는 우리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의 문제다. 너희 믿음이 적은 데 문제가 있다고 이곳에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30절에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세상 백성들은 이것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이 목숨이 계속되기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내 몸이 계속 따뜻하기 위하여서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없는 자로서 여겨지기에 염려하는 것, 그거 당연하지만은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희의 머리털을 다 세신받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이 너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너희의 아버지, 그가 너희에게 삼된 아버지의 관계가 되는 것을 너희가 믿는다면, 그분이 너희의 피로를 알고 계시는 것을 너희가 믿는다면 어찌 염려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이천우 목사님이라고 하시나요? 그분이 이제 각설이 예수, 각설이 예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자기의 자랑하던 간증을 쓴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집에서 나와서 정말 각설이와 같이 거지 생활을 할 때 그때 자기의 모습을 비교를 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그 아이들이 다 놀다가 집으로 쫓아서 들어가지만 그러나 자기는 자기 깡통에 이제 먹을 것이 언제 들어올 것인가 그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그러한 글을 써놓은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가 있어가지고 저녁때가 되면 오라고 아무게 불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그 시간에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이는 당연히 염려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누가 나를 재우실 것인가? 내가 어디 가서 잘 것인가? 오늘 저녁에는 내가 어디서 밥을 얻어 먹을 수가 있을 것인가?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 백성들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 사이에 살아가면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나도 염려해야 되겠구나 그래서 같이 깡통을 들고 있는 그 아이와 함께 자기 어머니가 있는 아이가 염려하면서 오늘 우리 엄마가 밥을 나에게 줄 것인가 오늘 밤에 내 방에 들어가서 내가 잘 수 있을 것인가 염려를 한다면 그렇게 못된 자녀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내쫓아야 마땅한, 그러한 못된 자녀일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의 부모를 안다면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아빠가 계시는데, 우리 엄마가 계시는데, 오늘 저녁이야 나오겠지, 집에 가서 잘 자리가 있겠지, 염려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는데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염려하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너희 아버지가 되신다고 주님께서 이곳에서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께서 너희가 세상에 이러한 매일매일 살아갈 일을 위하여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용고라고 또 한 가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것은 32절 말씀을 보면, 적은 무려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가 왜 염려합니까? 여러가지 무서움 때문에 염려합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직장 문제에 대한 두려움, 사업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우리 자녀에 대한 두려움, 여러 가지 두려움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찍어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적은 물이여, 무서워 말라. 너희가 왜 무서워하며 염려하느냐?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이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어찌하여 다른 시시한 것을 가지고 그 염려하고 있느냐? 그렇게 이곳에서 묻고 계십니다. 이러한 얘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소재를 하는 일을 하면서 열심히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길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그 길을 청소하는 이러한 것이 그의 생업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가지고 그 생명은 그 빗자루였습니다. 그 중요합니다. 그 자기에 있는 얼마 안되는 재산을 흡자해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그가 이제 그 일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 시에서 어떤 사람이 나왔습니다. 당신 암호함은 게 아니요. 예 그렇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누구누구가 아니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형님은 누구누구가 아니요.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위하여 이만한 재산을 당신에게 남겨주었소. 큰 재산이 그에게 유산으로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까지는 그가 아끼면서 애기 중기하던 그 빗자루였지만 그것을 던져놓고 빨리 그것을 받기 위하여 오라고 하는 대로 그 사람과 같이 갔다 하는 이러한 얘기를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우리가 우리 생활 가운데서 쉽게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이것 없으면 내가 살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것들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매일매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면서 그것의 두려움 가운데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느냐. 우리가 반박할 수 없는 그러한 논의로서 주님께서 이곳에서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염려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문제라고 먼저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내가 이 정도의 생활이 아니면 생활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시지만은 그러나 우리가 우리 믿음 생활 가운데에서 잘 믿던 사람들 또는 성경 역사 가운데에서 우리가 가진 것 없이도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겨나가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없으면 나는 망한다고 생각되고 나는 아무것도 없이 파산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자리에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늘, 나라를 소유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섬겨나간 사람들 얼마든지 여러분도 이야기할 수 있고 저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염려함은 우리의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다. 먼저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갈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돼요. 그 다음 또 한 가지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의 참으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살아가게 하는 그러한 문제를 가져온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을 뒤집어가지고 잘못 그 프라이오티를 두고 잘못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하는 문제가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가서 보면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우복보다 중하지 않느냐?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우복보다 중하다. 그것은 누구라도 그저 할 수 있는 평범하고 그것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 가운데, 우리의 지나친 염력 가운데 살아갈 때에 이 진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 물질의 많음에 있음에 달려있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기 쉽습니다. 여기에 이 부자라고 하는 이 사람, 먼저 자기가 많은 곡식을 거두고 내가 곡관을 짓고 더 크게 짓고 물건을 많이 쌓아두고 내가 평안히 살아가겠다. 물건이 많은 것에, 자기의 재산이 많은 것이 자기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리석다. 꼭 너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 재물을 모으는 것이 우리의 삶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영혼을 위하여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오늘 이 말씀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재물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의 영혼입니다. 나의 영혼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의 영혼은 빼빼 마르도록 확대하면서 물질만을 위하여서 그것만을 염려하면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뒤바뀐 삶이다. 먼저 살찌어야 될 것들을 살찌지 못하게 하고 다른 거기에 따라오는 것들을 위하여서 먼저 있어야 될 것을 희생하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옆에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과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아까 우리가 찬송하면서 노래한 것처럼 언제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 그 세 가지가 다 있지만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하고, 자녀와 부모가 사랑하고, 친구와 친구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어떠한 재물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는 가운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조그만의 유익을 위해서, 몇 푼의 재물을 위해서 사랑해야 될 사람을 미워하고. 요즘 그러한 것들을 읽어봅니다. 자기 부모가 얼마만의 재산이 있습니다. 한 50만불의 재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너무도 건강합니다. 금방 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좀 빨리 가야 되겠는데 부모를 그저 죽여버리고 그 다음에 그 유산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고 했다가 그것이 발각되고 자기 자신이 비참하게 되는 이야기들 그저 한두 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문에 자주 나오는, 자주 있는 사건들입니다. 물건을 사랑하는 관계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그로하여금 멸망으로 이끄는 그러한 길이 됩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무엇이 먼저 중요한가? 나의 영혼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랑해야 될 사람들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우리가 물질에 대하여 너무 염려할 때 매일매일 살아갈 삶에 너무 매달려 있을 때에 우리 주위에 자라는 아이들을 구경하지 못하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축복된 시간들을 물건을 모으는 데에 다 버릴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 여러분들이 잘 아는 미스터 화 라고 하는 독립 장로계의 장모님이 계십니다. 아마 그런 분들은 아마 직장이 우리와는 다르게 더 여유가 있는 그러한 분들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 아마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계신 분들은 대도록이면 예를 들지 않기를 위해서 다른 교회분을 예를 듭니다. 그러나 그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자기의 직장이 있지만 그러나 자기의 자녀가 축구시합을 할 때는 그곳에 직장을 접어두고 축구시합 하는데 쫓아가가지고 거기에서 코치를 하고 거기에 앉아가지고 그 게임마다 나가서 응원하고 하는 모습을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애들이 자라나는 모습 그 옆에서 같이 즐기고 그것을 같이 느끼면서 생활하는 것 몇 푼의 돈을 더 많이 모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먹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너무 많이 싸우려고 하는 것보다는 오늘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 내가 돌아보야 될 사람, 나의 자녀들을 돌아보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사람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가 있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곳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지나친 물질에 대한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을 잊어버리고 살게 하기 쉽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주시고 계십니다. 20절 말씀을 다시 가서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재물을 쌓았는데 자기의 모든 삶을 바친 그러한 사람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록 찾으리니 그러면 내 예비한 것이 네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치 못할 수가 있다." 너무 세상에 물질에 염려하면서 그것만을 붙잡고 살아간다면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치 못할 수가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여치 못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부여치 못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대하여 부여치 못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일에 있어서 부여치 못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그 나라, 내 손으로 만들지 않고 영원한 그 집,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집을 나의 집으로 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썩지 않고 영원한 그 곳에 나의 보화를 쌓아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치 못한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먼저는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지나친 세상의 것에 대한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먼저 중요하게 생각할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하기 쉽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그러한 재물에 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게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33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리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족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는이라. 제가 어릴 때 자라날 때 저희 아버님이 섬기던 교회에 이렇게 황금함 위에 항상 써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대응되는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을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에는 좀도 독록도 먹지 않는다 하는 그 말씀을 이렇게 애써 놨던 것을 기억을 합니다. 아, 저것은 황금을 많이 하라는 얘기구나. 아마 그렇게 우선 짐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가르침이 무엇인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너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 말씀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날 가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했으니, 내가 어떠한 소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의 소유를 다 팔아서 다른 사람들을 구제하도록 나눠주고,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 그리하여 우리 서로 서로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우리 서로 서로 공동체에 생활을 하자.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자. 이렇게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그때 하나님의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새로 시작될 때 그때 그 교회가 이것을 신천해 보았습니다. 서로 서로 자기에 있는 것을 소유를 내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전부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것을 나누어서 생활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것은 좋은 뜻으로 그들이 신앙 가운데서 그것을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실패하였습니다. 로마서 15장 26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 그렇게 생활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다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예루살렘 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계속해서 그들을 도와야 되는 마게도니아에 있는 사람들이 아가야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그들을 도울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어려움을 그들이 안고 그 모임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그러한 모임을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 근간에 그 한국에서 그 전도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여기에 그 신앙촌을 만들어 놓고 우리가 신앙으로 우리의 재산을 다 그곳에서 다 바치고 우리가 다 같이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한촌 한 식구들이 되어 가지고 우리가 생활하자. 여러분들이 그 역사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 박동명 그 박대선 그 사람의 아들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많은 여대생들을 농락하고 그 재물이 썩어 넘어간 그러한 역사를 우리가 가까운 데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그 교회 역사 가운데 보면은 수도승들이 있습니다. 뭐 프란시스칸이라고 하는 사람들, 도미니칸이라고 하는 사람들, 베네딕천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서약하는 것은 보통 세 가지를 서약을 합니다. 내가 교회에 절대로 중성하겠다. 또는 내가 정절을 지키면서 내가 생활하겠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약속을 하는 것은 가난의 소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나의 재산을 가지지 않고 생활하겠다. 도미니카는 개개인의 재산은 허용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러한 공동생활하는 그 수도원의 재산은 우리가 허용한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카는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개개인도 어떠한 소유가 있어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도 어떠한 소유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러한 소원을 하고 내가 정말 가난하게 되고 내가 아무것도 없겠다고 그들이 주장했지만 그러나 그 교회의 역사는 그들이 스스로 고백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가난하게 되겠다고 한 이 고백은 나로 하여금 1년에 수십만 크라운을 벌어들이게 하는 그러한 수단이 되었고 내가 순종하고 복종하겠다고 하는 이러한 소원은 나로 하여금 높은 지위로 나를 올려놓았다고 하는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가 있는가? 이러한 가난하겠다고 자기의 것을 다 팔아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는 아무 소유도 없이 나는 그저 가난하게 살아가겠다고 하던 사람들 어떻게 그들이 그러한 물질적으로 타락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도미니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 수도원 자체는 그 소유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개개인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을 향하여서 오는 많은 헌금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수입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그들이 호화로운 그러한 생활들을 즐길 수 있는 그러한 재물들을, 그러한 소유들을, 그러한 영지를 그들이 소유하고 살아갔습니다. 프란시스카는 그러면 어떻게 그들이 재물을 소유할 수가 있겠는가? 개인도 소유할 수가 없고 이러한 수도원도 소유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 부패함이 그들에게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소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매니지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의 이웃의 것이기에 우리가 이것을 관리해 줄 수가 있다. 그래야 그들이 많은 것을 자기들이 관리하면서 그것을 자기들이 사용한 이러한 것들을 교회 역사에서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냐는 주머니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리 사유, 재산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것으로 해석한 그러한 모임은 실패하였습니다. 성경 가운데에도 우리가 그 역사를 읽어보면 아리마데 요셉을 볼 때에 그가 부자이었기에 그가 잘못되었다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읽어볼 수는 없습니다. 부자의 삶은 어려운 삶입니다. 천국에 가는 게 어려운 삶입니다. 가난한 삶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물질을 관리하고 하는데 따르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유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그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그것을 뒤집어 가지고 그러면 우리가 사유, 재산을 우리가 가질 수 있기에 그것은 전체적으로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성경은 아닙니다. 18절말씀을 우리가 다시 가서 읽어보시면 그 부자가 하는 얘기입니다. 17절부터 보겠습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돼, 내가 곡식사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또 가조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관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하여로의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나만을 위하여 염려하고, 나 자신의 평안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삶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이것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칼비는 이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것은 절대적으로 우리 소유를 다 팔아가지고 다 가난한 자가 되고 우리 이름으로 어떠한 적은 통장을 가지든지 우리 이름에 해당하는 무엇은 소유가 있으면 그것은 죄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은 아니라고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그것을 붙잡기 위하여 내 삶을 바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나의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때에, 나의 주위에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때에, 나의 주위에 하나님의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 그것을 위하여서 나의 것이 어려울지라도 그것을 바칠 수 있는 그러한 태도로 생활할 것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평안한 대로 남아서 그저 넘치기 때문에 그 남는 부분, 내가 안 써도 되는 헌 것을 주위에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나의 있는 것을 쪼개서 보아주라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나의 가지고 있는 땅이 적어지고 나의 가지고 있는 유산이 적어지고 나의 자녀에게 돌아갈 유산이 적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오늘 우리 주위에 필요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을 돌아보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나친 재물에 대한 염력 가운데 살아갈 때 이러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우리 주위에 맡겨진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또 한 가지 문제를 거기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어려움을 가져온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34절 말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우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에 가장 애쓰면서 그 보물만을 생각하면서 세상에 재물을 더 쌓아두기 위하여 그것만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그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모든 삶과 노력이 거기에 쏟아지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마음도 거기에 메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해 주시고 오겠습니다. 15절에 주님께서 그리하여 하시는 말씀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이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위에 살아가는 삶에 지나치게 염려할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에도 생각한 31절 말씀,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은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 가지고 우리가 믿음의 그 도전을 받습니다. 너희는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래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도하시리라. 참으로 그럴 것인가. 참으로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돌아볼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하나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나의 아들이라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타윗의 삶이 그랬습니다. 타윗이 자기가 이제 백향목구경하면서 하나님의 장막을 보았을 때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그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거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너에게서 내가 그 전을 받지는 않겠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드린 그 마음을 내가 기쁘게 받고 내가 이러한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다윗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 그 아들에게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삶 가운데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느니, 은과, 노트과, 철과, 나무며, 금과, 또 만호와, 박을, 많은 것을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함으로 나의 사유에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다. 그 다음 역대야 29장 14자리에서도 나의 백성이 무엇인가 너희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 할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아 싸우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다. 다윗의 마음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송겼을 때에 하나님께서 끌어하여금 그를 인정하시고 그와 함께 하신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여러분 가운데 이에 대하여 증거하실 수 있는 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 소위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면 하늘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여한 삶을 살아갈 때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채워 주심을 더하여 주심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염려하느냐? 왜 염려하느냐? 믿음의 문제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활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가 있다고 경고해 주십니다. 섬겨야 될 일에 힘써 섬기지 못하고 섬길 기회들을 잊어버릴 수가 있다고 우리에게 주님께서 경고해 주십니다. 우리가 따르기에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염려하느냐? 모든 탄심을 뭉개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기뻐하며 생활하며, 그가 채워주심을 우리 삶 가운데서 즐기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열 때에 우리의 지혜의 모자람을 먼저 고백하며, 이러한 말씀을 성령님의 은혜로 더욱 깨닫게 되며, 깨달을 뿐만 아니라 저희 생활 가운데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간구하옵나이다. 저희의 믿음없음을 불쌍히 여겨주시며, 저희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어, 모든 염려에서 노임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도서, 저희 삶 가운데 사랑해야 될 것들을 귀하게 생각해야 될 것들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숨기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심을 믿으며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 전적으로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는 그러한 믿음과 지혜를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오. 저희의 삶을 통하여서 주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시며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저희가 하늘나라에 귀한 보아를 쌓는, 많은 보아를 쌓는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Don't Worry. (Korean)
Sermon ID | 6100283631 |
Duration | 50:05 |
Date | |
Category | Sunday - PM |
Bible Text | Luke 12:13-34 |
Language | Korean |
© Copyright
2025 SermonA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