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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유대인들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과연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죄인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서 그는 아주 심도있게 예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 빌라도의 마음 가운데서는 우리 예수님에게 있는 신적인 영광을 이 이방인의 마음도 그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늘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이 빌라도는 자신이 확신한 바를 따라 행동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에 의해서 유대인의 압력에 굴복하면서 예수님을 넘겨주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이루는 과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를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아이러니한 많은 사건들과 의미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일들에는 단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상적인 일들이 너무나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아주 아이러니한 모습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많은 상징들이 숨어 있다는 것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예언하신 그 사건을 성취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연히 우리에게 자주자주 말해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사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죄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우리 예수님께서 6월절 어린 양으로서 아무 험없는 완전한 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확증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는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게 내어주게 되는데 주님이 죽으시는 장면을 통해서 요한이 증거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9장 17절에서 30절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넘겨지셔서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가셔서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요한이 첫 번째로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왕으로 선포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사람들이 그분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것을 요하는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높아지셨다 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인데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서 왕으로 선혼되고 계시는가? 여러분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과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궁극적인 의미를 요한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어떻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빌라도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있는 그 십자가에 명패를 붙임으로써 예수님을 왕으로 선언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동산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밤샘식문과 채찍질로 그 몸의 모든 기력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자신이 줘야 할 십자가의 가로막대도 지시고 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다른 성경에 보면 구레녀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십자가에 가루 막대를 쥐고 골고라까지 갔고 거기에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은 다른 복음소의 기자들이 이야기해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뤄놓은 그 과정에 있었던 사건들을 요한은 다 생략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마취 성분이든 쓸개가든 이 포도주를 거부하셨다는 것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였다는 것도 다 생략하고 요한의 마음 가운데 집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의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면 그 십자가에 명패가 붙여져 있었다는 것을 요한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강도를 옆에 두고 그 사이에 십자가를 못 박았는데 십자가 위에는 빌라도가 써 붙인 명패가 있었는데 그 패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하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글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말로 적혀 있었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개적으로 온 세상에 선포하는, 선언하는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차독하고 비참한 것인지 역사가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요한에게 있어서는 이 예수님의 극한 고통 가운데서 그분을 영광의 왕으로 인식할 수 있는 표정이 바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이 명패였습니다. 여러분 십자가형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권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이것을 발전시켰고 로마인들이 이 형벌을 완성했다고 말해집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은 인류가 고안한 형벌 중에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결코 이 십자가 형에 처할 수 없도록 법률로 정하였습니다. 이 십자가 형은 노예들이나 하층계급, 외국인들, 반역자들이나 아주 천한 범죄자들에게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형벌은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서 죽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나무에 매달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로마 천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은 비현실적인 역사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손에다가 못을 박고 발을 포개서 발등에다가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결코 사람이 그렇게 매달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시체를 발굴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 손목의 양뼈 사이에 못을 박고 발목을 포기해서 발등이 아니라 발목을 포기해서 두 다리를 같이 나무에다 박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다면 이 몸무게 때문에 이게 내려오기 때문에 십자가 그 사람이 매달려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엉덩이 있는 부분에는 가로막의 막대를 달아서 그 사람이 거기에 엉덩이를 걸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비로운 것 같지만 그러다 자비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 십자가 위에서 모세의 고통과 자기의 몸무게의 그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고 고통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구하내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그 나무 위에서 피를 흘립니다. 움직일수록 피가 나옵니다. 호흡곤란이 일어납니다. 그럼 알미아마 그는 쇼크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과정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그는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서 그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에게도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기 때문에 죄인들에 대한 경고를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머리 위에 명패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언어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와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여러분 헬라은은 그 당시 로마 세계의 공룡어였습니다 모든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헬라우를 할 줄 알았고 로마, 라틴어는 그들의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되는 언어였습니다 여러분 히브리언은 바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종교적인 언어였습니다 이 명패를 보고 유대인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것을 고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빌라도는 이 유대인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서 그들의 요청대로 예수님을 내어주는 그런 비굴한 판결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이 유대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렇게 세계의 언어로 기록해서 그것을 붙이고는 그것을 절대로 떼지 않고 내가 할 일을 했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빌런우가 하나님의 사역조, 공식적인 유대의 통치자로서 예수님을 어떻게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이 행동을 통하여서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너니 명패를 통하여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며 온 세상의 왕이라는 것을 보기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비참한 죽음을 죽는 죄수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온 세계의 왕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얼마나 기묘한 모습의 왕입니까? 빌란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그렇게 선언하였지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볼 때 이 모습은 결코 왕으로 인정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의 왕입니다. 여러분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왕이신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되었다고 그렇게 기록할 때에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왕이었습니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감추어진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토록 드러난 모습은 죄수의 모습이지만 그러나 그 죄수의 모습 이면에 예수님의 죽음의 실제는 그가 진정한 왕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왕답지 않은 왕의 모습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위시나 솔로몬의 영광과 위엄을 가진 왕이 아니라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며 조롱을 당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자신들의 교만으로 주님을 대적하며 희롱하였지만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십자가 위에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개시에 의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예수님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의 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죄에 대한 군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자신의 손안에 얻으신 진정한 영광의 왕이 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기이하게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패배를 통한 승리를 얻으시고 온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영광의 왕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왕대심을 깨달아 알아야 되겠습니다. 비록 그분은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의 신비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자기의 피로 죄인을 구속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 온 세상의 왕으로 높이 들려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두 번째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이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의 왕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왕대심은 헬라와 로마와 히브리어로 씌워졌습니다. 여러분 헬라의 문화는 알렉산더에서 전파되었지만 고대 근동지방과 로마제국이 다수리고 있는 모든 나라, 즉 전세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세계의 공룡가 헬라였습니다. 또한 헬라는 문화적인 중심성을 가지고 있는 언어였습니다 로마 세계 어디에든지 헬라 문화가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또한 라틴어, 로마어는 어떤 언어입니까? 로마어는 정치적인 언어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가 비치는 모든 곳에는 이 라틴어로 문서를 작성해야 하고 그것이 법률화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브리어는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여러분 이 빌라도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드러낼 때에 이 세 가지 언어를 다 썼다는 것은 기이합니다 그것을 그냥 히브리어로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거나 아니면 자신이 로마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냥 라틴으로 예수 유대인의 왕 이렇게 썼으면 끝나는데 그런데 굳이 빌라도는 이 폐에다가 세 가지의 언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빌라도의 이 행동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 온 세계의 왕이시며 온 세상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것을 그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로마 제국 안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와 종교와 모든 것을 통과하는 왕이시라는 것을 빌라도가 여기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 거분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것이 왕으로서도 퍼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사건의 모든 것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영적인 안목으로 읽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세 번째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왕이십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 개인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장면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장면을 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25절에서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라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러시되 보라 내 어머니라 하신데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것을 위하여 죽어가고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그 가련한 여인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께서 내려다보시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다. 거기에는 어머니와 이모와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거기에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요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사육을 감당하시는 가운데 그 발 아래 있는 한 개인을 잊지 않으십니다. 주님에게는 온 세상도 중요하지만 한 개인 슬픔 가운데 안타까움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자기 어머니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발 밑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십니다. 그 발라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주님은 죄인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의 주님으로 자신들의 왕으로 살아있는 그 주님이 자기의 눈앞에 있고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기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미약한 죄인들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주님의 그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좌절의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숨겨진 왕으로서 온 세상의 왕으로서 우리 개인의 구원의 주님으로 서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패배를 통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승리의 주님이 되신 이 십자가를 우리 모든 석부들이 리용환처럼 깨달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두 번째로 우리가 리용환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주는 진리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증언하는 요한의 증거를 따라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에는 우연과 실수가 없고 그 모든 일들이 성경을 이루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구원자가 되실 것을 곳곳에서 알려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성경의 예안들을 읽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메시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고난의 그 탄식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탄식을 단지 이 다윗의 자신의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경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아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서 그것을 자세히 읽는다면 다윗이 하고 있는 그 고난과 탄식은 개인의 탄식과 슬픔을 넘어서 그 고난을 넘어서서 탄식과 슬픔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바로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은 당시에 어떤 한 사건을 통해서 그것이 예언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사건을 넘어서는 어떤 더 큰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단순히 이 예언이 그 사건만을 말한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국면들이 그게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구약에 예언된 그 사건들은 단순히 구약에 있는 어떤 한 사건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장차 오게 될 더 큰 사건들을 기대하고 바라보도록 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약을 올바로 읽을 때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의 탄식을 단순히 그의 탄식으로 여기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가 하시는 말씀과 그가 당하시는 고난을 보면서도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3장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구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증보를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흐물을 인하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하미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러분 이 이사야 53장의 말씀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디오피아 내시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이 자기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그런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빌립이 무엇을 말해주었습니까? 그것이 이사야 자신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장차 그리토께서 오셔서 우리 인류의 죄를 대석하실 때 당하게 될 고난의 슬픔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은 이 장면을 읽으면서 과연 이사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은 그가 당하실 고난을 인하여서 예수 그리토께서 장차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당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생각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10편 2편에서 다위선 메시아를 대적하는 권세자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합니다. 10편 2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령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롬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맹긋을 끊고 그 결방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시며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시 자체를 보면 다윗을 대항하는 열반과 어리석은 군세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여러분 이 시에는 다윗의 능력 이상의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철장으로 온 세계의 권세자들을 깨뜨리실 것이라는 예언이 나오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 자가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라는 것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다위시 다른 열방의 민족들을 향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온 세상의 권세자들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이 권세를 그가 이기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구약 성경에는 수없이 많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대심, 그의 권세, 그의 고난을 통한 승리를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을 부자연히 읽고 그것을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과 그의 행하시는 표적들과 그의 죽음심의 이 장면을 통하여서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도 요한의 말을 통해서 예수 그리또의 이 죽으심의 장면이 우리가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냥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고 이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수치스럽게 죽었던 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는 그런 마음에 의문이 드는 사람들은 다 요한이 지금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억지로 예수님을 믿는 그런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들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고난의 장면을 보면서 10편 22편의 예언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고 그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서 한 깃씩 나누어 가졌고 또 속옷도 취하였는데 이 속옷은 바느질을 한 솔기가 없어서 그것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통으로 머리와 팔만 내놓을 수 있는 3개의 구멍만 있는 그런 통으로 짠 옷이어서 그들은 이것을 나누지 아니하고 그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를 서로 제비 뽑아서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용화는 이것이 바로 10편 22편의 예언을 이루는 그와 같은 장면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10편 22편 14절에서 18절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러 조각 같고 내 혀가 이틀에 붙은 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애호사스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의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소유물을 취하는 로마의 내 군병들의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주심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요하는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연히 일어난 불행한 일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이라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성경을 이루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여러분 요한이 솔기 없는 속옷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요한은 여기에 이중적인 의미를 절겨 사용하는데 그는 사람들의 이 행동과 사물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가 세밀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사건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동시에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사건이라고 그렇게 요한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옆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진정한 대제사장이 되신다 라고 우리에게 말해 주는데 그것을 바로 이 속옷을 통하여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요세프스는 이 솔기 없는 속옷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이라고 그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이 옷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바느질로 이어붙인 곳도 없습니다. 머리를 끼우기 위한 구멍만 있고 통째로 짜여진 긴 의복이었는데 이 의복은 바로 대제사장들이 입는 옷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입는 옷으론 고급 옷은 아니었겠지만 그러나 그 옷은 분명 대제사장들이 입는 그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옷을 나누지 않고 제비 뽑는 장면을 중요하게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토께서는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라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스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 삶이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는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만 특별히 이 장면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정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삶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메시아의 증거와 상징들이 나오고 있는지 여러분,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두 가지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그의 고난과 그의 삶에 있는 것들이 바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우연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메시아시라는 것을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획하신 모든 구속의 사약을 그가 완전히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요하는 이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그가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든 성교들도 이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 그의 고난의 신음소리와 그의 십자가의 모습과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도가 과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믿으시고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 번째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증언하면서 주님께서 죽으시는 마지막 장면을 28절에서 30절에 기록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하신 두 가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28절 말씀에 내가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고 30절에서는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님은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요한에게 왜 중요한 말입니까? 여러분 이것은 먼저 요한이 예수님의 옷이 성경의 예언의 솜씨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하사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10편 69편의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10편 69편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이 초로 마시웠다는 것은 바로 신포도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한 병사들이 예수님께 우술초로 예심 포도주를 먹이는 광경에서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우술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은 자기 집의 문설주와 임방에 우술초로 그 어린 양의 피를 찍어서 발랐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야마가 그들은 죽음을 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육체의 목마름 가운데서 고통당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요한복음 1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 배에서 흘러나는 생수의 강물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말씀을 생각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목마름은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는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조하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러분 우리는 세 가지의 의미를 적어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먼저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로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자신과 아버지는 하나이고 내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항상 말씀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과연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그것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순종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명령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승리하셨습니다 여러분 두 번째로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지를 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보게 되는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아들을 죽이까지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이 십자가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경이로움과 놀라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여기에서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구원사액이 완성되었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말씀에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위하여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이뤘다고 말씀하시는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이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과연 나의 주님이시라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성경의 증거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과연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는지를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발비아마 발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 다른 어떤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리를 확신하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요 19장 17-30절 왕으로 선포되신 예수님
Series 요한복음
Sermon ID | 112518132830121 |
Duration | 41:53 |
Date | |
Category | Sunday Service |
Language | Kor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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