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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대 후서 4장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대만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였노라. 네가 올 때 내가 들어와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음에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마을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에게 호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이야마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이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이 시간 간고하오니 성령님 이 시간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충만히 함께하여 주시며 말씀을 듣는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하여 주시사 이 시간 성령이 교회를 향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전하여지고 들려질 수 있는 은혜를 이 가운데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루퍼드 브룩이라고 하는 영국의 시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1887년에 태어나서 28세 비교적 오래 살지 못하고 191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1차 대전 동안에 쓴 군인들이라고 하는 그 시가 많이 읽혀지고 영국 사람들 가운데는 잘 알려지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 루퍼드 브루키라고 하는 시인이 한 번은 영국의 리버풀을 떠나가지고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구에 가서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배웅하려고 쫙 구두가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자기는 아무리 뒤를 돌려보아도 아무도 자기를 배웅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을 조금 돌아가다 보니까 남노한 옷을 입은 소년이 하나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에게 돈을 쥐어주면서 내가 이제 배를 타면 너는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나를 잘 가라고 배웅을 좀 해줘라. 그러면 내가 이 돈을 주겠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큰쾌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래서 이 사람이 즉시로 배에 올라갔습니다. 이제 배에 타가지고 이제 그 부도가에서 배가 떠나기 시작할 때 그때 그 아이의 이름이 윌리엄인데 윌리엄 안녕 하고 손을 흔드니까 또 저쪽 아래에서 그 아이가 손을 흔들면서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막 손을 흔들어가지고 그래서 이제 그가 그 리버풀을 이제 떠났다 하는 이러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소년에게 돈을 주어가지고라도 배가 떠날 때 나도 좀 이렇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아마 그러한 소원이 있었고 그 소원대로 그가 그 안녕 안녕하고 인사를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진정한 소원은 그저 어떠한 남모르는 소년이 안녕히 가세요 하는 그곳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이 자기가 떠나는 그곳에서 자기의 떠남을 참으로 아쉬워하면서 같이 그 석별의 정을 나누는 것이 그 사람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며,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며, 그래하여 헤어질 때의 아픔을 같이 나눌 수 있게 원하는 것,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가 읽은 김호대 후서 4장 말씀을 보았을 때 여기에 파울사도의 마음 가운데 있는 외로움을 우리가 엿볼 수가 있습니다. 파울사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그가 달려가고 이제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둔 그 마당에서 자기가 그동안 기대하였던 함께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달려가리라고 기대하였던 대마가 의외로 나를 버리고 파울사도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떠나가고 그리고 다른 그와 함께했던 많은 다른 동역자들도 여러가지 일로 다 흩어지게 되고 그가 누가와 함께 그 차디찬 감옥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기다릴 때에 아마도 그 마음속에 그 외로움이 찾아든 것을 우리가 이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디모델을 향하여 너가 빨리 오면 좋겠다 속히 내게로 오라고 디모델이 보고 싶다고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그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또 특별히 디모델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의 진입이 감춰있는 그 심정을 디모델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재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서 내가 변명할 때 그때 나와 함께 그 자리에 서서 목숨을 걸고 나도 그렇습니다 하고 나의 손을 붙잡아 줄 동역자들이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 내가 가장 그들과 함께 소개를 원하는 그때 그들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외로움을 그렇게 이곳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만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심정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외로움은 우리와의 금 때로는 시댓지 않은 그러한 이상한 일들을 하게 하는 것들을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뒤로 돌아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그러한 일들을 한 경험들을 우리가 또한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 학생들 가운데에서 학생들이 무슨 외로움이 있겠는가 그 친구들이 있고 공부하느라고 바쁘고 여기에서 정말 그 시험 준비만 하느라고도 너무 바쁜데 외로울 그러한 기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거기에도 외로움들이 있고 그것은 이상한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행위들을 그리고 그것에 따른 아픈 결과들을 경험하는 것들을 우리가 그동안도 여러 번 지켜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외로움,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피할 수가 있는가,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이 저녁시간, 우리가 이 파울사도가 먼저 지나간 이 외로움의 길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 외로움을 어떻게 피할 수가 있는가, 또는 이것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는가 하는 것들에 대하여서 잠시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가 이 외로움은 왜 찾아오는가, 외로움의 그 원인들을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지난번에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즙과 온 땅과 땅의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안에 3위가 계시는 것을 우리가 그동안도 공부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 삶이 그 사이에 있는 그 사랑의 관계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서로가 서로의 뜻을 위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충분한 그러한 삶에 있는 이러한 가까운 관계를.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 관계가 멀어졌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가장 괴로운 순간이 있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 그가 지고 있는 죄악을 보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준비하신 그 죄악이 그 아들에게 쌓여진 것을 보고 그 아버지의 얼굴이 돌려졌을 때에 그때의 그 가슴 가운데에서 피나는 그러한 절규를 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 해가고 절규하는 그 사미 사이에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를 우리가 따라서 형상과 그 모양을 따라서 창조되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아담을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창조하시고 그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매우 좋았지만은 그러나 그 가운데 좋지 못한 것이 하나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십니다. 창세기 2장 18자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혼자 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피를 만들겠다. 그리하여 하와를 창조하신 것을 우리가 창세기 2장에서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외로움을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그를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그리하여의 어거스틴이 얘기한 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그러한 빈 공간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그 말씀을 따라 우리에게 있는 그 외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게 하는 그러한 도구로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의 가족들이 모이게 하는 것에 이 외로움이 크게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보니까 아이들의 소원은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 고등학교 때쯤 되니까 이제 어떻게 하면 이 지옥과 같은 집을 떠날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한결같은 소원이고 그래서 그 소원들대로 이제 대학교 때 저희 아들에는 떠났고 그 다음에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저희 딸이 또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가지고 한 6개월이고 얼마 동안은 아주 신나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생활들 하면서 좋은 것 같은데 그런데 또 얼마 있다 보니까 서울에서 또 기어들어오더라고요. 아마도 혼자 있으니까 좀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까 집으로 또 찾아오고 지금 군대가 있지만 또 쉴 기회만 있으면 집으로 올 기회만 찾아가지고 돌아오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2년 동안 그린스보로에 가서 거기 있으면 자유롭고 좋은 줄 알고 떠났는데 가서 보니까 별 모양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시 이제 돌아와가지고 요즘 저희와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외로움이 그들을 집으로 가까이 내몰지 않았는가 저는 그렇게 그 외로움의 도움을 우리가 받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외로움이 있기에 우리의 이웃을 돌아볼 수 있고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은 우리에게 건강한 느낌이며 그것은 자체가 죄악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잠시 우리 생활 가운데 그러한 외로움의 느낌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어느 날 우리의 사회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자들이 또는 신학자들이 한가지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외로움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100년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피하급수적으로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그래하여 헨리 데이빗 토르라고 하는 이러한 사람이 이야기한 것을 보면은 이 사람은 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한 100년 전에 사는 사람들이 일생을 통하여 만나는 사람의 숫자를 오늘날에는 1년 안에 우리가 다 만날 수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만남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 만남은 외로움의 자리라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각각 함께 모여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자리라고 이야기한 것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여전히 외로움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더 깊은 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뉴스를 보니까 이러한 얘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죽은 지 1년 반인가 2년이 되었는데 아무도 그를 찾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전부 은행 자기 구조에서 자연히 모든 물세나 전기세나 세금이나 이런 것들을 저절로 페이하도록 다 셋업을 해놔서 이 사람은 그 아파트에서 죽었는데 계속해서 세금도 잘 내고 물값도 잘 내고 자기 월세도 잘 내고 하니까 아무도 그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한 1년, 1년 반 지나서 그 친척 가운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무슨 필요가 있어가지고 연락을 해보니까 연락이 안 돼서 찾아가 보니까 그 사람이 죽은 지 최소한 1년 반이나 2년 되었었다 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그 드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옆집에서 죽어가지만은, 그리고 죽었지만은,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썩은 냄새가 날 때에야, 저 집에 너무 냄새가 나고 이상하다, 한번 들어가보자 하는 그러한 이야기들, 우리 주위에서 종종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우리 주위에 많지만은, 그러나 만남이 없는, 그리하여 함께 외로워하는 그러한 장소로 이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또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외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자라는 과정 가운데 우리가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아이들이 이제 내가 자립을 해보겠다. 그리하여 내가 이제 세상을 배워보겠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활을 바꾸었을 때 부모와 가정과 친척을 떠나서, 친구들을 떠나서 먼 곳에 그곳에 놓여졌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긴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외로움을 경험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는 제가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 보니까 이 외로움은 아무런 정당한 이유가 없이 찾아올 때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몸에 아마도 어떠한 감정상의 병적인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잔뜩 쌓여 있고 그 사람들이 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지만은 그러나 그 마음은 산바람이 부는 그 쓸쓸한 정막한 그러한 틀판처럼 정말 그 괴로움 가운데서 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러한 외로움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그러한 외로움이 그 마음 가운데 찾아오는 모습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미 우리가 생각한 대로 그 파울사도가 경험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특별히 그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떠났을 때 느끼는 그 외로움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함께 일하며 함께 죽을 자리에서라도 같이 설 것으로 기대했던 이러한 사람들이 허물어져 나가며 함께 변명해야 될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때의 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되는 그러한 외로움을 이곳 파울사도가 또한 경험해 보았습니다. 원수들에 가득 쌓여져서 그를 삼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기회를 찾고 있는 그때에 원수들 밖에는 사방에 자기를 둘러싼 다른 사신들의 동지를 바라볼 수 없는 그때에 그가 외로워했던 이러한 여러가지 원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 가운데서 외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외로움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에 이러한 외로움은 여러가지 위험을 우리에게 가져오고 있습니다. 외로움이 가져오는 함정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또한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외로움이 찾아왔을 때 거기에 따라오기 쉬운 것은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나는 나 혼자 밖에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소파에 앉아가지고 채널을 계속 돌리면서 그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이러한 외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그 게임에 들어가서 그저 정신없이 그 게임을 하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려보기 위하여 그 수 없는 시간을 그러한 여러가지 전자게임이나 컴퓨터 게임들에 매달려가지고 거기에서 그 외로움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또는 마약을 통하여 여러가지 술을 통하여서 이러한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함정입니다. 외로움 자체는 죄악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외로움이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생산적이지 못하게 한다면 그 외로움은 우리에게 죄가 되게 하는 그러한 시험이었고 우리가 거기에 떨어졌을 때 우리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그러한 자리로 떨어질 수 있는 그러한 함정이 외로움에게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이 외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서 있을 곳에 서 있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위험함이 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이 외로움이 문제입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민 온 학생이 중학생쯤 돼가지고 이민 와가지고 학교에 갔습니다. 학교에 갔을 때 미국 학생들이 여기 밥 준 수는 아마 조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뉴욕에 있는 공립학교에 갔을 때 상당히 살벌한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처음 왔을 때 놀려주기도 하고 좀 때리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고 상당히 그 생활을 해나가기가 어려움이 있고 혼자 그것을 견디기가 어렵고 외로움 가운데서 학교 가는 재미를 점점 잃어가는 그러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특별히 친절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들만 보면 따라가서 그들에게 무엇도 사주고 누구한테 얻어맞을 때 가서 같이 싸워주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건 반드시 깽단들입니다. 그 깽단들이 하는 일은 새로운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포섭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서 친절을 보여주고 얻어맞을 때 가서 때리는 사람을 다시 때려주고 그래서 너희가 우리 편에 있으면 너는 안전하고 너는 이제 평안할 수 있다. 이 한국에서 온 아이가 깽단에 대해서 모르겠습니까? 그런 것이 나쁜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외로웁고 다른 길이 없기에 그래서 형형하면서 그러한 아이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깽단에 이미 들어간 아이를 빼내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 빼내오기 위해서 그 부모가 그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 아이들을 아무도 모르게 선생님 저에게도 그 주소도 얘기해주지 않고 전화번호도 얘기해주지 않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아이들을 살짝 빼가지고 먼 데 있는 다른 지방으로 보냈을 때에야 그때에야 극갱단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드문 경우입니다. 아이들이 왜 그러한 데 빠지는가? 외롭기 때문에. 그 외롭지 않았다면 결코 따라가지 않을 것들을 따라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외로움이 왔을 때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과 손잡는 그러한 경우들을 우리가 종종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외로움이 주는 함정들입니다. 위험합니다. 또한 이러한 외로움이 왔을 때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는 함정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그러한 자신의 가치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어버리게 하는 그러한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가까운 데서 이러한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박전수에 와서 공부하려면 1년에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됩니까? 모르긴 몰라도 몇 천 불은 더일 것 같습니다. 아마 만 불이 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가지고 이곳에 공부하러 왔을 때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회 옆에 어떠한 크레딧카드가 하나 놓여있을 때 그것을 가져다가 그리고 남의 크레딧카드를 가지고 상점에 가서 그것을 그어가지고 그것을 사용하고 몇 푼의 이익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우매한 일을 하고 그것 때문에 값진 값을 치는 사람들을 우리가 옆에서 보았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그저 얼마 되어보지 않는 그러한 무슨 옆에 있는 그러한 물건들을 보고 그것을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어넣고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고 그것 때문에 무척 비싼 값을 부모님들이 치러야 되고 또 자신이 치러야 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그 어떻게든지 도와주기를 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를 원하고 그래서 이제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일반적으로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너무 외로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는 그러한 대답들을 들어보곤 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이 자신의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값진 자리인가 그것을 그저 크레딧카드 그것을 가져다가 몇 푼 자기가 사고 싶은 그것을 사는데 사용하거나 옆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집어서 자기의 가방에다가 집어넣음으로써 만족하려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이상한 행동을 가져오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외로움은 이러한 위험함을 실제로 우리 사이에서, 우리 가까운 데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나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피해야 될 길입니다. 우리가 또한 이러한 외로울 때에 우리가 맺어서는 안 될 관계를 맺는 모습들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내가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는 그러한 경향들을 우리 주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어떠한 성급한 결혼의 관계를 맺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외롭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보다 아무래도 같이 살면 낫지 않겠느냐 하는 이러한 생각에서 우리가 성급한 관계를 맺는 경우들을 우리가 종종 주의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은 혼자 좀 외로움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저주받은 결혼생활보다는 훨씬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웃음의 소리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가 우리 주위에서 보는 아픔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위에 있는 분들의 그 삶에 대하여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저에게 그러한 기회를 좀 주어줬습니다. 어려운 분들, 아픈 분들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삶에 대하여 같이 아픔을 나누고 기도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 그들과 이야기할 때 참으로 그 안타까운,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관계, 그것 때문에 일생을 통하여서 말할 수 없는 희생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문서에 있는, 그래야 이것은 성경 말씀이지만 이것을 기록할 때 아마도 웃으면서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자문 21장 19제를 보면,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은이라고 이러한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꼭 여자를 향하여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여자분들이 또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술 먹고 주정되는 남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은이라 아마도 여자분이 이 다문을 기록했다면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반드시 축복된 그러한 그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한 길은 아닙니다. 외로움이 성급한 관계를 맺게 하였을 때에 성경에서 맺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러한 관계들을 우리가 맺었을 때에 부모들이 그것에 대하여 경고하는 그러한 관계를 맺었을 때에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서 경고하는 그러한 관계를 내가 외롭게 맺었을 때에 일시는 그것이 지혜로운 것 같으나,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에 그것 때문에 괴로움 가운데서 눈물고 밤을 새우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 밤새도록 하여도 다하지 못할 많은 한들이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외로움은 이러한 함정들을 우리에게 안고 찾아옵니다. 이러한 외로움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그 무기들을 항상 우리가 잘 갈고 닦아서 항상 쓸 준비가 되어 있게 하는 것, 우리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외로움의 묘약들이 있습니다. 그 특효약들이 있습니다. 외로움의 특효약들 몇 가지, 이곳에서 우리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디모드의 후서에서 보면 바울이 참으로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얼마나 외롭습니까? 이제 나이가 많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외롭습니다. 그 다음에 또한, 그가 병들었습니다. 병들으면 또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가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한 사람이 아무도 없이, 그가 외롭게 홀로서 자기의 입장을 변화해야 되는 이러한 외로운 자리에, 그리하여 많은 이 외로움이 안고 오는 그 함정들이 그 주위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가 지뢰밭을 지나는 것처럼 이 외로움의 길을 지나갔지만 그러나 그 길을 그가 잘 지나가고 이 가운데서 조금 더 범죄함이나 이 가운데서 조금 더 어두운 부분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한층 더 높은 자리로 올려주는 그 외로움이 그를 한층 더 승화시키며 그를 더 귀하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게 하시는 그러한 자리로 그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이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에 대하여서 이 성경이 주는 여러가지 도움들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해보기 전에 먼저 일반적으로 우리가 외로움이 찾아올 때 우리가 세상에서 가질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에는 이것은 숨겨둘 문제가 아닙니다. 외로움을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아프다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도 괜찮고 내가 삶 가운데서 바쁘다 하는 것은 이야기해도 괜찮지만 내가 외롭다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를 원치 아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에 여러분의 부모님에게 그것을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어떻게 그런 걸 이야기하는가? 부모님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해 못한다면 선생님 가운데 여러분을 이해할 분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가운데도 없다면 교회 가운데 여러분을 돌아볼 그러한 분은 혹시 없겠습니까?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밖에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고 이 외로움을 위하여 같이 그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분은 없는가. 반드시 자기 친구들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우리 주위에 두신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두신 그러한 여러가지 권위들과 그러한 기회들을 우리가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육신의 감정이라고 할까, 어떤 혼문의 부작용이라고 할까, 저는 의학도가 아니기에 잘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의학적인 면으로 해결될 수 있는 그러한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할 때 여러분들이 의사를 찾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신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받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또한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외로움이 우리 로하여금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외로움이 홀로 있는 시간으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홀로 있기에 외로운데 외로움을 홀로 있는 시간으로 바꾸라는 것이 무슨 말이냐? 이 홀로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사용한 인물들, 하나같이 이 홀로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야곱이, 간사한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이긴 그 사람이라고 하는 이름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까? 그가 홀로 광야를 지나감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떠나서 아무도 없는 광야를 홀로 걸어가다가 그곳에서 도를 베개하고 누웠을 때에 그가 홀로 마음가운데 그 아픔이 있었고 그 외로움이 있었고 슬픔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홀로 있는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시간으로 바뀌었고 그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시간으로 바뀌는 것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모세가 그것을 경험합니다. 파울사도도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파울사도가 구원받았을 때 그 구원받자마자 당장에 내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앞서서 달려나가지 않고 내가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왜 아라비아로 갔겠습니까? 그에게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외로울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홀로 있는 시간으로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제 홀로 있는 것이 필요하기에, 나에게 자란함이 필요하고 내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나님을 대면함이 필요하기에 내가 이 시간을 가진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내가 홀로 서는 그러한 시간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이 크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제게 도움을 준 이야기였다면 백락준 교수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백락준 교수는 연세대 대학원의 총장이었는가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한국의 학대 중의 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젊었을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학자긴 학자인데 지독이 못생겼습니다. 얼굴을 아무리 뜯어놓고 봐도 아무리 매력적이다 그런 것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세가 많고 생활을 곱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 점점 그 얼굴에 매력이 있고 우리가 존경하고 그가 나이가 많았을 때는 존경할 만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젊었을 때, 학생 때 아마 그 지독이 다른 사람이 볼 때 매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학생 시절에 다른 연애도 하고 싶고 여러 가지 소원도 아마 가졌었고 그러한 관계도 비슷한 뭐가 있었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딱지를 맞은 것 같습니다. 그저 조금 뭐가 되는 것 같다가 이 사람의 얼굴만 보면 싹 돌아서고 하는 것들이 계속되고 그래서 이 사람이 외로움 가운데서 홀로 있게 되었을 때 그가 그것을 또한 홀로 있는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제 이러한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치 않으니 이제 나는 나 홀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때부터 그가 이제 홀로 앉아서 그가 해야 될 일들을 부지런히 하였다고 합니다. 학생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공부 아닙니까? 그때 이제 그가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가 없기에 그 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더니 그것이 그로하여금 그 일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찾아주지 않은 그것이 오히려 그 삶 가운데 큰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어서 그가 크게 여러 가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고 저도 같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가 학생 때 중고등학교 때 이렇게 이렇게 살이 좀 찌고 좀 이렇게 녹두하고 하니까 뭐 되는 게 없습니다. 저도 뭐 그래서 백낙준 교수를 보면서 그 다음에 그 희망을 가진 것은 아 이제는 백낙준 교수도 그렇게 했으니 나도 나 홀로 서야겠다. 그랬던 때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때 대학교 때 그때 이제 홀로 서기 하였던 그러한 기억이 있습니다. 외로운 기회 우리가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우리가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해야 될 일들, 우리의 삶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그때 감당함으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한 외로움을 통해서 오래 남는 귀한 열매들을 맺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성경에서 또한 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외로움은 반드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 외로움이 홀로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로 하여금 한층 잘하게 하는 그러한 기회로 우리가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항상 이 외로움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삶입니다.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돌아보시고 계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나의 가슴 가운데 계속 외로움 가운데서 나의 삶에 아무런 기쁨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탕자의 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처럼.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아버지의 남겨줄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그런 법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저 아버지의 재산을 반절점 빼앗다시피 해가지고 가서 그것을 쓸 때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게 생활했으나.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삶을 알았을 때 그는 외로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젊음을 주셨지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나가서 내 마음대로 사용해 보았을 때 그 결과는 하나입니다. 외로움입니다. 그 탕자가 멀리 가서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고 사자주는 사람 없고 돼지가 먹는 주염 열매로 배를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 귀한 가정의 아들이 하나님께서 만든 그 사람이 세상의 죄악으로 세상에 주는 그 조그마한 기쁨으로 그가 배를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충분히 그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가 없는 것.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때 그 탕자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외로웠을 때 기억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데,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버지가 받아주실 것으로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같은 놈! 어떻게 아버지가 나를 용서할 수가 있고 나같은 놈을 받아줄 수가 있을 것인가? 나를 그저 하인으로만 써주시면 이 외로움을 면하고 배고픔을 면하겠다. 나는 그것만 해결하면 되겠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아는 대로 아버지께서 달려나와서 그를 품에 안고, 그를 시켜주시고, 신발을 신켜주시고, 그에게 다시금 아들의 영화를 되돌려준 그러한 역사. 그가 그 다음에 외로울 필요가 있습니까? 배고플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계속된 외로움과 배고픔과 죄가 가운데서 고통이 있다면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에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내어놓고 회개하였을 때에만 그때에만 우리가 우리의 외로움을 참으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외로움의 묘약 중의 묘약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우리가 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갔을 때에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며,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기도하였을 때, 10편 68편 6절에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전에는 홀로 있었으나 이제 가정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10편 34편 17절에서 의인이 외치며, 여왁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란에서 건지셨소다. 요호하는 마음이 상한 자에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해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방법들을 우리가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한 여기에 바울사도가 보여주는 몇가지 직접적인 방법들을 우리가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기억할 것은 우리가 나가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남을 섬기는 대신에 섬김을 받기 위하여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외로워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가서 일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셨고 우리를 보내주셨는데 가지 아니하고 앉아서 누가 나의 상처를 감싸주고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다면 그것은 믿는 사람이 마땅히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나에게 주신 탈렌트를 사용할 기회가 어디가 있는가?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러한 일을, 이러한 기회를, 홀로 있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 기회를 찾는 것,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우상일 형제님께서 이번에 큰 계획을 세우시고 전도 훈련을 받으시기 위해 가십니다. 그 준비하시는 과정이 얼마나 거창합니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을 때 그것을 준비하시는데 정말 피나는 그러한 노력을 하시면서 준비하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정말 외로운 자리에 홀로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저 책가방 챙겨가지고 아마 떠난다면, 비행기만 탔다면 여러분들이 남에게 어려운 여러가지로 삶가운데 사랑의 관계를 많이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여러분들이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외로움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독특한 기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그 17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나를 감금케 하시며 나의 외로움 가운데서 나를 지켜주시는데 그것은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고 이제 끝까지 이 말씀을 전하여야 뵙기에 나에게 이 외로움 가운데서 절망하거나 이러한 외로움의 함정에 빠질 시간이 없다고 이곳에서 바울사도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사도가 이곳에서 그 외로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내 곁에 계셔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감히 하셨다고 말씀해 줍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은 다 나를 버렸고, 나의 삶 가운데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은 하나하나 다 떠났고, 이 땅에서 내가 바라볼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주님이 함께 함을 알고 생활하시고 있습니까? 갑자기 여러분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성장해 나가는 데서 그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삶 가운데서 매일매일 교제하는 생활, 그에게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의 명령을 듣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삶 가운데서 이루어나가기를 바라며, 그를 섬겨나가는 생활 가운데에서, 그를 순종하는 생활 가운데에서, 그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에서, 내가 그를 필요로 하였을 때에 그가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만져보며 그를 경험해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다른 돈을 사랑하지 말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매일매일 삶 가운데서 주님은 나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심을 잊지 않고 내 영혼을 향하여 주님께서 나를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계속 상기시키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하여 우리 삶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거룩해지면 거룩해질수록 우리가 홀로 있을수록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졌을 때 홀로 있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다고 우리 삶 가운데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주님과의 교제 생활 오늘 여러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생활에 주님이 가까이 있으면 필요할 때 그때 주님을 경험하시기 위해서는 오늘도 주님과 함께하는 그러한 교제의 생활, 점점 거룩함에서 살아남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러분들에게 외로운 자리에 놓여졌다면, 오늘 이 가운데 한국에서 부모님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있습니다. 또는 먼 지방에서 이곳으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에 외로움이 찾아오고,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오는 때가 있다면, 또한 이것을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이곳에 두신 분이 누구인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를 믿는 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한복음 20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 하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라. 여러분들을 보내신 분이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이곳에 공부하러 보내셨고 일하러 보내셨고 여러분들의 삶의 매일매일의 보내심을 허락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이곳에 보내도록 허락하셨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겠기에 여러분들이 주님이 보내신 이곳에서 내가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외로움의 이러한 묘약들을 잘 사용하시며 여러가지 외로움이 가져오는 그 함정들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이 외로움이 우리의 거룩함을 한걸음 더 높이며 우리의 삶을 더욱 낫게 하는 그러한 귀한 기회로 사용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외로울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 없이는 우리의 삶의 참다운 행복과 기쁨을 알지 못하도록 우리의 가슴 가운데 빈 곳을 남겨놓으셨음을 감사합나이다. 그리하여 저희가 외로울 때 주님을 바라보았고 주님께서 저희의 가슴에 찾아오셨으며, 그리하여 저희가 이러한 외로움을 딛고 이기며, 그리하여 그 외로움을 통하여 주님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게 하여주시는 예를 감사합나이다. 또한 저희 주위에 저희가 구하였을 때에 저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쌓아주시며, 저희를 염려하며 저희와 가까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귀한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 자매들로 주위를 둘러주셨음을 감사하옵나이다. 또한 저희가 외롭지 않도록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많은 기회를 허락하여 주시며, 그리하여 저희의 삶 가운데 주를 섬김으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옵나이다. 그러나 저희가 기도하옵기는 이 가운데 이 저녁에도 외로움 가운데에서 주님을 찾아 나가는 영혼이 있거든 오늘 그를 만나게 하여 주시며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 들고 나오는 영혼이 있거든 그를 염접하여 주시며 주께서 자녀삼아 주시며 주의 위로하신과 주의 풍족하신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소원하옵나이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의 자녀되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외로움 가운데서 주를 잇고 주의 도움을 알지 못하고 생활하던 그러한 형제와 자매가 있거든 다시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면, 그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게 하여 주시면,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하던 파울사도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저희의 성결한 생활을 회복시켜 주시며 더욱 거룩함으로 주를 가까이 경험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주시옵소서요. 오늘 저희가 주를 섬겨야 될 자리에서 뒤로 물러가며 남이 나를 어떻게 섬겨줄까 기다리고 있는 이러한 형제와 자매가 있거든 오늘 내가 섬길 길이 어디에 있는가 주를 섬길 길을 찾아 나가며 주를 기쁘게 하여 길을 찾아 나가서 삶 가운데 주를 섬김으로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열매의 기쁨을 우리 삶 가운데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How to Overcome Loneliness (Korean)
Sermon ID | 11220410346 |
Duration | 51:08 |
Date | |
Category | Sunday - PM |
Bible Text | 2 Timothy 4:9-18 |
Language | Kor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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