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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봉독관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5장 21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5장 21절에서 28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테봄 15장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도로와 시돈 지방으로 돌아가시니 가난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주 다위세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연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장에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올소이다마는, 걔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 예수께서 대답하이루시되, 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내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은이라. 아멘. 하나님의 안대를 구하면서 잠시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여전히 저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복되고 거룩한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초소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도 저의 마음을 잔잔하게 하시고 또 고요하게 하시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에 있어서 연약한 것을 주께서 아시옵나이다. 우리가 보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고 듣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고 교훈을 얻게 하시고 또 그 교훈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때에 말씀에 풍성한 열매들이 저희의 삶 가운데 맺혀 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을 붙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공경과 어려움과 시험에서 건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여행길 가운데 있는 성도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잘 예비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심의 부족 환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단에 섰습니다. 말씀에 은혜와 용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을 주의 성령께 온전히 위탁하올 때에 이 모든 말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막대고금에는 주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 사람이 두 명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두 사람이 모두다 유대인들이 아니었고 이방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개처럼 그렇게 부정하다고 여겼던 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두 사람 중 첫 번째 사람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이었고 그리고 두 번째 다른 한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온 가난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믿음에 있어서 칭찬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믿음이 조금 다른 그런 측면들이 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의 전능하신 능력을 확신하던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라고 하는 주님의 전능하심을 강하게 확신한 그 믿음이 로마의 백부장의 믿음이었다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가난한 여인은 예수 그리스의 선하심에 대해서 확신하던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선하시고 자비와 긍률이 풍성하시다라고 하는 그 강한 확신을 이 가난한 여인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칭찬받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이 가난한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 가지 진리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로 여러분들께 전달하기를 원하는 진리는요. 주님의 침묵이 결코 거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찾고 주님 앞에 기도할 때가 있는데 주님이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침묵이 결코 거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인내로서 계속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침묵하시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의 간구를 계속 듣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가난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주 다이세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 하시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고 마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 지방에서 사역을 하시다 잠시 떠나서 이방 땅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시려고 그쪽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과 병인 구절인 마가복음 7장에 보시면요.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7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거기를 떠나 도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하나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려 하셨다 그 말씀은 아마도 개인적으로 제자들과 그런 시간을 보내시려는 의도로 그곳에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바리세인들과 석유관들은 우리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곳마다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주님과 논쟁을 벌이려고 하고 주님의 복음 사역을 해방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인성의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그것은 지치는 일입니까? 격려하고 또 칭찬하고 또 용기를 붙도도 좋아도 사실 보금 사용이라는 것이 힘든 것인데 그것을 방해하고 논쟁을 벌이면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잠시 떨어져서 제자들과의 그런 휴식의 시간을 가지시려고 의도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도 결코 은밀히 지내실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에 대한 소문이 그 이방 땅에도 퍼져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한 가난 여인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다라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딸의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서 이 여인은 큰 소리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고합니다. 22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이르되 주님을 향해서 큰 소리로 도움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다 그런 심정을 알지 않겠습니까? 자녀의 그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간절하게 또 얼마나 큰 소리로 그렇게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간구하며 기도하겠습니까? 이 여인 또한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서 만약 주님이 유대 땅에 계셨다면 주님 앞에 도움을 구할 수가 없는데 주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이방 땅으로 잠시 오신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고 그래서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놀라운 것은 유대 땅에서는 주로 주님의 복음사약을 반대하고 주님과 논쟁을 벌이려던 사람들을 주님은 상대하시면서 지치고 피곤해지셨는데 오히려 이방 땅에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그 이방 땅, 거룩하지 못한 땅이라고 하는 그곳에서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하면서 주님 앞에 나오는 믿음의 여인을 만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을 부르는 묘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신앙 고백 아닙니까? 우리도 예배 순서에 보면 신앙 고백을 하죠. 사도신경으로. 그 사도신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에 대한 그런 잘 요약된 그런 신앙 고백인데요. 주 다이세 자손이요.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 선지자들 통해서 약속하신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또 유대인들이 논쟁을 벌이며 계속해서 표적과 기사를 보이라고 그렇게 주님을 공격했는데 이방 땅에 있는 이 여인은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우리의 구원자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바로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메시아이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주님께 나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 여인의 강구에 대해서 이 믿음의 여인의 강구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 하시니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그냥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쭉 읽는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성경은 정말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그것도 성경, 일독, 대단한 것처럼 그게 어떤 분들은 말씀하실 수 있는데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겁니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할애해야 일독을 할 수 있는데 일독을 가지고서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많이 읽어야 합니다. 수십 독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의문들을 설명해 줄 친구들이나 모쾌자들이 필요하죠. 그래서 말씀을 읽으시면서 또 설교를 들으시면서 의문이 나면 그것을 잘 적어 놓으시고 모쾌자들에게 질문하시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모쾌자가 아니더라도 여러분들보다 좀 더 성경을 많이 아시는 주위에 있는 분들께 도움을 구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얼마나 많은 그런 의도가 있는 말씀입니까? 이 한 구절을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쉽지가 않아요. 왜 주님께서 침묵하시는가?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한 불쌍한 여인이 지속적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메시아이시다, 약속하신 그리스토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고 도움을 요청하며 그렇게 부르짖고 있는데 주님은 이 여인을 무시하시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를 불렀는데 제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 저 목사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하고 매우 기분이 불쾌하시겠죠. 때로는 화를 내시기도 하겠죠. 교만하다. 주님이 지금 이 여인에게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해 나가시자. 23절에 보면 극게 주님의 제자들이 중재에 나서게 됩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에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한두 번 간구하고 만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23절의 말씀을 충분하게 해석할 만한 그런 시간은 없습니다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측면에서는 좀 귀찮아서 너무 이제 계속 부르니까 빨리 저 여인을 치료해 주시든지 해서 보내십시오 주님이라고 중재를 하게 됩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의 침묵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의 간구가 무시되었고 주님은 나의 절박한 형편에는 관심이 없으시구나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오해입니다. 주님이 침묵하셨다고 해서 이 여인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쉽게 오해될 만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몇 번 읽어나가시면서 이게 뭐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라고 포기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간구하고 또 부르짖는 그 동안에도 주님은 이 불쌍한 여인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간구를 여전히 듣고 계셨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알고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 여인이 기대한 대답을 곧바로 주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주님의 선하신 의도가 나타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왜 주님이 침묵하셨는가 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이 여인을 활금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려는 그런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단순히 몇 번 주님께 간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고 또 간구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여서 기도했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내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겠다라고 포기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의 침묵은 주님의 거절이 아닙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더 간절하게, 더 열렬하게 기도하라는 주님의 사인입니다. 때로 주님은 깊이 잠이 드신 분처럼 우리의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기도를 전혀 듣지 않으시는 분처럼 행동하시기도 하고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진노하시는 것처럼 화를 내시는 분이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0편 44편 23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여 깨소수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여러분 이 10편 44편의 그 시인의 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피곤해서 주무시는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 좀 깨어나십시오 하나님 어찌하여 주무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시오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해야 할 만큼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가 주님의 의도를 오해하여서 기도하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힘이 부족한 것입니다. 10편, 80편, 4절과 5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하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까 화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할 때 화를 내시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진노하시는구나. 기도하는 나를 기뻐하시거나 나를 격려하시거나 응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구나, 노하시는구나, 진노하시는구나라고 느껴질 만큼 그렇게 어려운 환경을 경험하고 있고요.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십니다. 또 때로는 화를 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또 그 눈물을 마시게 하신다고 시편 기자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더 이상 주님의 침묵 때문에 포기하셨습니까? 여러분,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다시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침묵은 결코 거절의 사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열렬하게, 더 뜨겁게, 더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을 통해서 증거하기를 원하는 진리는요. 주님께서는 자주 사랑하시는 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주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정하고 하나는 가까이로 나아가려고 할 때 그 길에 장애물들이 놓여 있는 것들을 우리가 종종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 가난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마태복음에는 믿음 때문에 칭찬을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죠. 그 중에 한 사람이 가난한 여인입니다. 근데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얼마나 많은 시험을 주시는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시험은 주님의 침묵이었죠. 부르시저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큰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24절인데요. 예수께서 대답하이루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연노라.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연노라.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면 더 좋았겠다라고 생각이 들만한 그런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이 가난한 여인이 듣고 싶었던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은 이 여인의 간구에 대한 답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침묵하시니까 중지에 나서서 주여 저 여인을 좀 보내십시오. 빨리 어떤 조치를 취하신 다음에 보내십시오라고 그렇게 간청을 드렸을 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에 보냄을 받았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에만 보냄을 받은 메시아다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메시아로서, 구원자로서, 그리스로서 자신의 사역이 이스라엘 집에만 한정되는 것이다. 여기 이스라엘 집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 여인에게 적용해 본다면 유대 땅도 아닌 이방 땅에 살고 있는 이 가난한 여인은 주님의 돌고매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기 미국에도 의료 혜택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건 아니잖아요. 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대상들이 있어요. 그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래서 그제 뉴스에 보니까 미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다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그런 뉴스를 봤는데 그게 실현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신문 기사를 지나가다 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육도 마찬가지로 아, 이방 땅은 내가 관심을 두고 내가 돌보는 지역이 아니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침묵으로 상처받았던 이 여인의 소망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주님이 만일 이 말씀을 저나 여러분들에게 하셨다면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계속해서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는 더 이상 부르짖지 말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이 가난한 여인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주님은 종종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런 혹독한 시험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25절에 보면요 이 여인은 이 냉혹한 말씀 앞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전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 말씀 외에 다른 어떤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너는 내 양이 아니야 나는 너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야 라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 앞에서 무슨 기도를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 여인은 그저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런데 주님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보이는 어느 측면에서 보면 또 매우 모욕적일 수 있고 또 이 여인을 책만 하시는 듯한 그런 말씀으로 주님은 이 여인을 다시 한번 시험하십니다. 26절에 세 번째 시험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자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모든 소망을 다 끊어버리고 이 불쌍한 여인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내기,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하기에 충분한 그런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보금은 많은 은혜와 또 이적적인 치유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약속들은 택한 받은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가난 여인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베풀어지는 은혜의 떡을 감히 기대할 수 있는가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처럼 많은 오해와 안개와 구름에 가려져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보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한때 신앙생을 했다가 어떤 오해 때문에 영원히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말씀 하나 때문에, 어떤 사건 하나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참 슬프고 또 고통스러운 것인데요. 그것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타락하였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연약함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또 저에게 이렇게 주어진 말씀이라면 아마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상처를 받고 절망 가운데서 계속 살아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주님이 지극히 높이고자 하시는 자들을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자들을 많은 시험을 통해서 먼저 그들을 낮추시고 자신의 비천함과 무과치함을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던 사람들은 이 가난한 여인 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는 자들을 다 시험하시는데요.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이 시험하셨습니까? 백세의 아들을 주시고선 그 아들을 나에게 바치라. 얼마나 큰 시험입니까? 얼마나 불가 같은 시험입니까? 또한 우리는 요셉의 시험을 압니다. 10대의 나이에 사랑하는 부모의 곁을 떠나서 노예로 팔려가서 애국에서 많은 오해를 받고 감옥살인을 하는 이 시험이 결코 작은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욕기를 보면 욕은 얼마나 그 시험이 혹독했는지 욕기 23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용광로에 비교합니다. 얼마나 뜨겁고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들을 시험하시는데 종종 그 시험이 한꺼번에 닥쳐오기도 하고 또 맨 마지막 그 시험은 우리를 집어삼킬 만큼 혹독하고 사납고 매섭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에 많은 혼란과 시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당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을 시험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증거하기를 원하는 진리는요. 참된 믿음이란, 칭찬받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지막까지 붙잡는 것입니다. 어떠한 믿음이 큰 믿음입니까? 어떤 믿음이 칭찬받는 믿음입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가난한 여인이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결코 주님의 시험을, 이 혹독한 시험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받는 믿음은 참된 믿음은 주님께서 하시는 그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이 아무리 절망적인 말씀을 할지라도 그 속에서 여전히 소망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25절에서 그 여인의 기도를 중단시키는 그 말씀을 들었지 않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그 말씀 앞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여인은 자신이 이스라엘 집에 속하였는지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나는 택함을 받았는가? 나는 이스라엘 집에 속하였는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고민하고 절망하고 또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논쟁을 벌입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이런 특권을 주십니까?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베풀지 않으십니까? 라고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를 좀 설명 드리고 싶은데요. 주여 저를 도우소서 문맥을 따라서 어떤 것이 맞는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지배만 보내심을 받았어도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런 의미일까요? 이스라엘 지배만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았다 했을 때 주여 그래도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이스라엘 집에 속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하는 그런 말씀일까요? 아니면 이 실망스러운 말씀 앞에 이 여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겠죠.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이 여인의 믿음이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저의 믿음이 흔들리오니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런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인지 우리는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이런 말씀을 가운데 하나이든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그런 말씀이겠죠.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고 시험 때문에 절망 가운데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무 기도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주여 저를 도우셔서 이 기도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 칭찬받는 믿음은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붙잡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제 주님은 더 큰 시험을 이 여인에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이하니라. 이 말씀 앞에 모욕일 수도 있고,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석유관들이 자신들을 개라고 그렇게 멸시하고 부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참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소께서 개라고 하는 말을 언급하시는 것을 들을 때 이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라고 그렇게 화를 낼 수도 있고 참 더 이상은 기도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될 만큼 혹독한 말씀인데 이 말씀 앞에서도 칭찬받는 믿음은 주님의 선하심을 붙들고 있습니다. 27절에 보시면요. 주여 올소이다. 주여 올소이다. 주여 올소이다. 반박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라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박할 수도 없고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모든 것을 인정하며 신의 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찬한 처지에 있는가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혜를 발휘해서 주님의 말씀 안에서 소망을 발견해냅니다. 저는 택함을 받은 자녀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허락된 그 떡은 아닙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그런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로도 저는 충분합니다라고 주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신앙은 주께서 하신 소망의 메시지 가운데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소망의 메시지 가운데서도 결국에는 트집거리를 찾아내고 부정적인 결론을 끌어냅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주님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소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래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지 트집거리를 잡으려고 하고 결국에는 부정적인 결론으로 끝마쳐지는 것이 불신앙인데 참된 믿음은 정반대입니다.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메시지 속에서도 언제나 소망을 발견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결론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가난한 여인은 불과 같은 시험을 잘 통과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마치 고름이 끼고 번개가 치고 또 많은 비가 내려서 앞을 잘 볼 수 없었다가 이제 비가 그치고 구름도 탁 거치고 햇볕이 이렇게 쨍하게 떠서 하늘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의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절이 28절입니다. 예, 예수께서 대답하이루시되, 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내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은이라. 이것이 결국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의도인 것이죠. 여자여 내 믿음이 크도다. 내 소원대로 되라. 주님을 오해할 수 있는 많은 그런 말씀들 있죠. 결국 이 믿음을 통해서 이 여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받게 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실망스럽고 절망스러운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잡으며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며 신뢰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본 것처럼 주님의 선하신 의도가 처음부터 잘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했는데, 자비로우신 분이시라고 했는데 왜 나의 삶에는 이렇게 많은 어려움이 있는가? 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욕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다가 내가 그때 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라고 요비 그렇게 고백하는 그 고백을 우리는 듣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주님의 의도가 의심을 받고 그것으로 인해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불평이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의도가 아닌 결국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고 더 간구하게 하셔서 주님은 항상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즉시로 이 여인이 간구하였을 때 그 즉시로 응답하셔서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끝나기를 원치 않으신 거예요. 그리고 사실 이것은 제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본 것인데 처음 서두에 제가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시달리셔서 이방 땅으로 잠시 쉬러 가셨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마 그것도 맞을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아마도 이 여인의 절박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그곳으로 가신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유대 땅에 계셨다면 이 여인이 감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주님은 이 여인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이방의 여인이지만 이 여인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주님께로 다가올 수 있도록 그 지방으로 가시는 거예요. 잠시지만 그곳으로 가 계실 만큼 그렇게 사랑하신 거예요. 그래서 단순히 불쌍한 여인의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 여인은 후세대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겠죠. 혹독한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녀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녀의 이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게 하시고 모든 후세대들로 하여금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십니다. 마태가 소개하는 위대한 믿음, 칭찬받는 믿음이라고 하는 그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은 항상 이러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라고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십니까? 거절이 아닙니다. 여러분 더 기도하십시오. 더 열정적으로 강구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삶에 많은 시험을 주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끝까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대적하는 상황 같은 그러한 때에도 마지막까지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주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와 또 저의 믿음을 더욱 한 단계 성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사역하셨던 유대 땅에서는 큰 결실을 보지 못하셨지만 잠시 피하여 가신 그 이방 땅에서 놀라운 믿음의 여인을 만나셨고 그 짧은 시간에도 이 여인의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시험을 주시고 또 단련하셨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받게 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항상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구하게 하시고 또한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며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참된 믿음이, 칭찬받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지막까지 붙들은 것이라는 진리를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님 이 진리가 우리 마음 가운데 각인되게 하셔서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높이며 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오늘도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칭찬받는 믿음
ID do sermão | 8523172915893 |
Duração | 45:08 |
Data | |
Categoria | Culto de Domingo |
Texto da Bíblia | Mateus 15:21-28 |
Linguagem | core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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