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ប្រតិចារិ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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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29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29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낳았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왕의 명령을 무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한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부하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내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국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 빠져 죽었으며. 아멘.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잠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에게 무한한 자비와 금류를 배부려 주시사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저희 자신들을 비추어 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의 다른 것을 향하여 있다면 성명께서 그 모든 분주하고 세상적인 생각들을 다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청정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경험되게 하여 주옵소서. 심히 부족한 종 단에 서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의 연약함을 금률이 여겨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듣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겠사오니 하나님 우리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시옵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고 맛보며 그리고 그 능력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도록 성령께서 오늘도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라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또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비교하게 만들어주고 결국에는 주저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택하게 하고 이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모세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생각해 보면서 이 진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세상의 보아보다도 하나님의 상주심을 더 귀하게 여겼고 그래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권한 받기를 담대하게 택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 또한 믿음으로 애국 왕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으며 왕의 명령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서 어린 모세를 석 달간 숨겨 길렀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항상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고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 많은 가치와 비중을 두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 네 번째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번 모세의 믿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법문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일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한 것이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6월절을 준수하는 데서 잘 드러났습니다. 본문 28절 상반절을 보면 예식을 정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사실 오해의 요소가 좀 있습니다. 6월절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정하였으니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국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6월절을 준수하였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6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들을 주셨는데요. 그것을 요약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치룟기 12장에 의하면 6월절 어린 양을 선택하되 흠이 없는 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며칠간 세심하게 살펴보고 흠이 없는 어린 양을 택하는 것 그것이 6월절 준수의 가장 첫 번째 규례였습니다 두 번째 규례는 가족 식구수대로 잘 계산하여서 어린 양이 모자라서도 안 되고 어린 양의 고기가 남아서 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식구수대로 잘 계산해서 식구가 너무 작으면 이웃집과 함께 어린 양을 나누라는 규례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을 준비해서 14일 날 밤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자기 집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린 양을,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집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요. 그 밤에 그 어린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어야 했습니다. 뼈를 꺾어서도 안 되고 물에 삶아서 먹어서도 안 되고 반드시 뼈를 꺾지 않은 채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못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어린 양의 고기를 먹으라 하는 그런 규례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이 6월절 규례지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이 6월절 규례를 지켰을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교례들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 것으로 여겨졌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짐승의 피를 집 문에 바른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붉은 피를 교회 문 입구에다가 발라놓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시겠습니까?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붉은 피가 그 문에 발라져 있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더 큰 혐오감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모여서 양고기로 훌륭한 식사를 하는데 급히 먹어야 한다. 신을 신고 허리에 띠를 띠고 쓴나물과 함께 급하게 어린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는 얼마나 잘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까? 이제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저도 한국에서 명절을 지켰던 그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참 그 명절 때의 저녁 식사는 풍성하였고 그래서 잘 준비한 음식을 가족들과 나누면서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서 대화를 나누며 오랫동안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귀한 음식을 먹으면서 빨리 식사를 끝마치는 그러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의 맛들을 음미하면서 대화해 가면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양고기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으며 틀림이 없습니다.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주 양고기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귀한 음식을 나누면서 서둘러 먹으라, 급하게 먹으라고 하는 이 말씀은 어쩌면 매우 못마땅한 그러한 교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6월절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 가운데서는 왜 우리가 이런 의식들을 준행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6월절을 잘 준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런 하나님의 6월절 규례를 잘 지킬 수 있었을까요? 본문 28절입니다. 믿음으로 6월절과 피 뿌리는 의식을 정하였으니 하나님의 개시의 말씀을 믿었고 믿음으로 그 규례들을 비록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일 수 있고 거리끼어지는 일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들을 잘 준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 누구도 흠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 집 문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고 하시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또 그 고기를 먹되 불에 구워서 급하게 먹으라는 그 말씀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한 사람도 태만한 사람들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생각하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가 그 믿음이 사용되고 그 이후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마음 한켠에 잘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에 처음 순례의 길을 시작하는 그 시작점부터 마지막 천성에 들어가기까지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례를 준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8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장자를 멸하는 자라고 하는 무서운, 무시무시한 표현이 있는데요. 장자를 멸하는 자란 다름 아닌 6월절 밤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장제의 죽음의 재앙을 수행했던 하나님의 천사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 6월절 밤에 애국당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 집마다 이 장자를 멸하는 자, 이 죽음의 천사들이 재앙을 내렸고 그래서 각 가정의 장자들이 또 짐승의 첫 새끼들이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장자를 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유월절을 준수한 그래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에 장자들과 가축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그 존재들을, 그 천사들을, 장자를 멸하는 자라고 히구리스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매튜애미 목사가 이 부분과 관련해서 아주 인상적인 글을 남겨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족속 중 어느 누구라도 어린 양의 피를 문 앞에 바르는 일을 태만이 하였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또 혐오스럽기 때문에 그 일을 태만이 여겼다면, 그들이 밤새도록 기도하였을지라도 죽음의 천사는 그 집에 들어가 그들의 첫 태생을 죽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에서 면제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교례를 잘 진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그 밤에 밤을 세워서 기도를 했을지라도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그 집에 장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왜 멸망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는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 쫓김을 받는가? 그것은요,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는 자 구원받은 자는 죄를 짓지 않았고 또 구원받지 못한 자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죄를 범한다는 데 있어서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물론 죄 때문에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맞지만 보금시대 이후에 사람이 여전히 멸망을 당하는 것은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6월절과 예수 그리스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6월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에 대해서 그분의 십자가의 대석의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이 문제에 호기심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이 그리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의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게시 안에서 추측해 보는데 히브리스 11장에 보면요. 6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진행하였다 라고 말씀하는 것을 통해서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이라고 하는 진리 그리고 그 어린 양의 피해 효력에 대해서 만큼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범죄한 죄인이 하나님의 진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의나 사람의 선행이나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구역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그분의 대속의 죽으심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근거가 됨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의 이 보배로운 피는 고원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뿌려져야 한다는 사실이죠. 그 피가 6월 전에 그 집 인방과 좌우 설조에 발라져야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의 보배 피가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그 진리만큼은 그들이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바르는 그 일을 태만이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이 진리를 조금 더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피를, 이 피뿌림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의 대석의 피를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피를 바를 수 있습니까? 저는 네 가지로 최대한 간략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데요. 첫 번째는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로마스 1장 18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불경건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가장 우선이고 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불경건의 죄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불의한 죄 하나님의 개명글, 율법에 불순종하는 그런 죄 그것을 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불의가 더 클 것 같지만 로마서 1장 18절에 보면 불경건함과 불의이라고 그 순서를 불경건을 앞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 불경건과 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 불의의 죄 그리고 죄에 싹쓴 사망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불경건한 주인이며 내가 불의한 주인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는 영원한 사망의 처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리스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은요.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선행이나 우리의 의로는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 차례 또 수십 차례 수백 차례 기회를 주신다 할지라도 우리의 노력과 선행과 의로는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며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인들을 대신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의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고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는 너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적용시키는가?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자비와 금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자비를 구하면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의 보여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죄의 용서를 허락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며 죄인들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무한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요. 마지막 네 번째는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나 선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의 대속의 주구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혐오하시고 진노하시지만 회귀하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실제적으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기도는 한 번 따라하고, 뭐 용적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한 번 기도하고 끝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죄 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까지. 사람들이 아무리 너는 죄 용서함을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설령 저와 같은 목사가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죄 용서함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까지 인내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주 예수 그리스의 핏불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의 피뿌림을 경험하셨습니까? 사도행전 17장 3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지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하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복음의 약속을 믿고 의심치 말고 죄를 지은 흉악한 죄인이랄지라도 죄를 회귀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함유해서 회귀하라 하셨으니. 그래서 11장을 통해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두 번째로 그들의 믿음이 나타난 것은 첫 번째는 6월절을 준수하는 일이었고요. 두 번째는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2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국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6월절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떠나서 애국을 탈출하게 됩니다. 서둘러 애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는데 그들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도망자와 같이 자신의 주인의 집에서 도망친 노예들과 같이 그렇게 서둘러서 급하게 애국을 빠져나왔는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고 마치 도관에 쥐가 도관에 든 쥐처럼 막다른 골목에 갇힌 그런 암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애국왕 바로가 이스라엘이 애국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돌변하여서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잡으려고 추적해옵니다. 초록기 14장 5절에서 8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국 왕에게 알려지며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의 섬김에서 놓아 보냈는가 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 새 선발된 병거 600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주위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여하께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감대히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수백 년 동안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며 학대를 일삼던 애국왕 바로가 전쟁에 나아가 전면전을 치르는 것처럼 애국의 모든 병거를 대동하고 그 군대를 이끌고 자신들을 잡으려고 추적해오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키 14장 10절은 이렇게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기록합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 즉 애국사람들이 자기 뒤를 따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와께 부르짖고. 이때 하나님께서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은 홍해 바다가 갈라져 그 길 사이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동치는 바다의 태산과 같은 두 물 벽이, 물 기둥이 형성됐고 그 물 기둥 골짜기 사이를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일입니까? 파도가 치는 그 바다가 갈라져서 좌우로 물기둥처럼 물벽이 이렇게 세워져 있고 그 길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길이 난 것입니다 그 길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 수족관에 가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렸을 때 아이들이 수족관을 몇 번 가본 적이 있는데요. 유리로 터널처럼 수족관을 만들어놨죠. 그래서 마치 바닷속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아마 오늘날은 더 잘 해놨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유리로 만들어 놓긴 했지만 엄청난 물이 그 위에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어도 있고 큰 대형 물고기들이 지나가는데 가까이에서 그 물고기들을 관찰하는 것은 정말 실감나는 일이죠. 그래서 항상 그 수족관 터널에는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합니다. 근데 여러분 그 유리가 언제 깨질지 금이 간 것이 보이고 언제 그 물이 쏟아져 내릴지 그래서 물고 함께 그 수중 생물들이 한꺼번에 나올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터널을 지나간다면 그것은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나마 안전한 유리로 되어 있으니까 조금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호기심에 지나가지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리벽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바다를 큰 물기둥처럼 물기둥 벽을 이렇게 세우는 그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이를 두려움이 없이 통과할 수 있었을까라고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식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지 않았습니까?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처럼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공포심이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을 말씀하셨는데요. 추르키 14장 15절과 16절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왁께서 모세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바다를 가를 것이고 이스라엘이 그 바다 사이로 난 그 길로 건너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 바다 속으로 난 그 길로 나아가기보다는 차라리 바로 앞에 항복하고 엎드려서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그렇게 자비를 구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도 가족들과 함께 그 물기둥 사이를 지나기까지 여러분, 그 길이가 수백 미터 아니면 수 킬로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확히 그 바다의 길이를 측량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백 미터 길게는 수 킬로가 되는 그래서 이스라엘 6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축과 함께 그 바다 사이로 난 길을 지나가기까지는 소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한 나절 이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 시간까지 물기둥이 안전하게 버텨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 물기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면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산채로 물속에 수장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믿음은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홍해를 건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 사이에 난 길로 홍해를 건너 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2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애국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왜 애국군대는 홍해에서 수장되어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애국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노예로 붙잡고자 하는 죄악된 욕심에 이끌려 바다로 쫓아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바닷속으로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죄악된 욕심에 이끌린 바로와 바로의 군대가 자기 발로 스스로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위험에 한복판에 뛰어들어왔는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그렇게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사건이 끔찍하지 않는가라고 저렇게 14장을 읽으면서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근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 바로와 이스라엘 향해서 경고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장제의 죽음이라고 하는 마지막 재앙을 통해서 경고하셨고 또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최후의 경고를 하셨습니다 어떻게 출렁이는 바다가 좌우로 물기둥을 세우며 갈라질 수 있습니까? 바로가 어떻게 그와 같은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지 않습니까? 그 기적은 바로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에 이끌린 그들의 삶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고 그들의 눈을 가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죽음의 자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즉시하지도 못한 채 위험의 한복판으로 바다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실 때 그들의 병과 바퀴가 빠지고 굴러가기가 어렵게 만들었을 때예요.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바닷속 한가운데에 있었는가를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14장 25절입니다. 그 병과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근데 여러분 이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이미 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때의 위험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 늦은 것입니다.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27절과 28절, 줄기 14장 27절과 28절 3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모색하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메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국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하께서 애국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국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여러분, 우리가 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성도는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죄악된 욕심에 이끌리는 것을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죄의 욕심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임박한 진노가 가까이에 있지만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피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와 같이 멸망을 당하기까지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다가 스스로의 파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국의 군대의 마지막 최후의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마치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달려갈 때 앞에 빨간불 신호등이 켜집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경고지요. 즉시 차를 속력을 멈추고 서라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사거리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국군대에게 이제는 스탑하라, 더 이상 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추격하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를 바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욕심에 이끌려, 죄의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무덤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멸하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항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게 하고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 많은 가치를 두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장애물들을 경험합니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의심이 있습니다. 거리낌이 있습니다. 비난이 있습니다. 조롱이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11장 마지막을 보면 죽음이 있고 핏박이 있고 사자의 굴에 던져지는 무시무시한 그런 시련들이 있습니다.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에 나아가는 일은 쉬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게 하고 그래서 인내와 성실함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우리 앞에는 여전히 순례의 길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할 때 많은 장애물들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일 수 있고, 세상적인 손해일 수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세상의 유혹일 수도 있고, 세상의 비난일 수도 있고, 친구들의 조롱과 또한 박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내와 성실함으로 결국에는 그 의무들을 다 수행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시는 것처럼 악인들이 죄악 가운데서 멸망하지 말라고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유효하다고 자신의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나님 앞에 이 구원의 은혜를 간고하라고 그래서 성령께서 마음의 인치시기까지 인내로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에 있어 경험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선조들의 탁월한 믿음의 삶을 살펴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가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가 연약함과 주저함과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는 약하고 우리는 연약하지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갈 때 우리 속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사 모든 영적인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모든 시험들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빛나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 가운데로 저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 예수 그리스의 핏불임을 경험하지 못한 자도 있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죄악에서 멸망하지 아니하도록 오늘도 부르심을 하나님 기억하게 하옵시고 사람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범죄하였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편을 순종하겠지 않기 때문이면서 알게 하시고 오늘도 그 마음을 열어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옵소서. 구원의 은혜를 위해서 간구하게 하옵소서. 인내로서 기도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기까지 그렇게 행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그리스에 놀라우신 구원의 복을 경험하는 그 복된 자리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믿음
លេខសម្គាល់សេចក្ដីអធិប្បាយ | 102201815587315 |
រយៈពេល | 46:42 |
កាលបរិច្ឆេទ | |
ប្រភេទ | ការថ្វាយបង្គំថ្ងៃអាទិត្យ |
អត្ថបទព្រះគម្ពីរ | ហេព្រើរ 11 |
ភាសា | កូ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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