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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interpretation is available now. Please use the device. 유한복음 1장 9절에서 18절까지를 읽고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찬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야마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이 오메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극률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렇게 주님의 오심을 저희들이 기뻐하며 성탄 찬양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예배 순서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이 시간 저희들 순서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또 들으려 하오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에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성탄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저희가 마음으로 깨달으며 살아갈 때에 저희 심령의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살아가는 성도들 가운데 함께하지 못한 성도들 있습니다. 연약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오나 나올 수 없는 성도들을 특별히 도와주시고 그 삶의 모든 필요들을 공급하여 주실 때에 평생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연약한 육신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또 특별히 영적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 빛을 비춰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또 말씀을 증거하고자 단에 섰사하오니 극률히 여겨 주시고 말씀에 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온나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어린아이로 오신 이 사건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 하는 그런 뜻이 바로 성육신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 14절은 짧은 구절인데요. 저는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을 중심으로 성탄의 메시지를 여러분들께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짧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많은 진리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는데요. 특별히 우리 주님의 성육신 사건을 설명해 주는 참으로 뛰어난 본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봉 1장 14절은 우리 주님의 성육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바로 이것이 성육신 사건이 담고 있는 그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한하신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비천한 유한한 인간이 되셨다 하는 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성탄입니다. 여기 말씀이라고 하는 단어, 말씀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 주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말씀. 하나님 되심. 우리가 우리 주님의 신성, 하나님 되심을 이 말씀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그럼 1장 1절에 보면 이 요한 복음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비기닝이라고 하죠. 시작. 우리가 그 시점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버거운 그런 개념이지 않습니까? 창세 전에,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태초의 말씀이 계십니다. 근데 이 말씀이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연약한 인간이 되셨다라고 유한복음은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성육신, 우리가 기뻐하는 성탄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육신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 주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성, 사람 되신, 참된 사람이 되심을 우린 인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참된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된 인간이시다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 주님에 대해서 성포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의 한 인격 안에 하나님 되심과 온전한 인간 되심이 공존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주 예수 그리스에 대한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했을 때 이것을 종종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되신 주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신성을 포기하셨다고 생각하시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성을 취하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말씀은 신성으로서 하나님의 그 신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 주님은 인간이 되셨는데 여러분,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비참과 불행한 것들에 친히 종속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우리 육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 있잖아요. 피곤하고, 연약하고, 병들기 쉽고, 줄이고, 목마르고 또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에 처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을 취하셨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바로 인간이 되셨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왜 영원하신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셨는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메시아의 사명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메시아,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구원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구원자의 사명이라는 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할 만한 그러한 화목제물로서 죽으시기 위해서 영원한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셨다라고 성경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잖아요.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 하나님의 신성만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실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왜 인간이 되신 이후에도 하나님이신 그 신성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계십니까? 모든 죄인들이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여러분 단순히 인간이기만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만족될 수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졌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 죽는다? 그것이 공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의는 죄가 범해진 것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구속자, 우리의 중보자는 하나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는 이런 말씀 있는데요.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셨다. 하나님의 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4경전 20장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가 하나님의 피라. 무한하신 영원하신 존재이신 하나님의 흘리신 피이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의 그 죄를 속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는 인간의 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신 분의 보배로운 피가 십자가에서 흘려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진력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가? 정말 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셨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요. 요한보금은 거기에 대해서 많은 증거들 제시합니다. 요한보금에 기록된 기적들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고 하는 분명한 증거들인데요. 저는 그중에서 요한보금 5장에 나타나는 38년 동안 병을 알았던 베데스다 모가의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을 첫 번째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38년이나 병들어서 고생하던 그 병자를 향해서 일어나서 내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누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기적은 불가능한 것이죠. 또 요한복음 9장에 보면요. 나면서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 인생이었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쌍한 소경을 주님이 먼저 보시고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시고 신로한 곳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신로한 곳에 가서 눈을 씻으니 태어날 때부터 볼 수 없던 그 소경이 보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1장, 한 장만 더 언급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였던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되었는데 그래서 그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는데 주님께서 그 무덤으로 가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옵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명백한 증거들을 우리는 이제 유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육신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인데요.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인데요.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얼마나 복찬 말씀입니까? 우리 가운데 고하셨다. 여기 고한다라고 하는 말은요 숙소를 정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의 성육신 이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영적인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셨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국당에서 나와서 광약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은 그들 앞장서서 행진하셨습니다.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적으로 함께하셨고 또 그들이 가난한 땅에 정착했을 때는 늘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죠. 성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라고 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참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참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적인 임재가 아닌 실제로 성육신하심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는데 33년 동안이나 그 백성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잠깐 그린비를 방문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제 대선이 가까이 오니까 그림 그려도 올 수 있잖아요. 대선 후보로 나선 그런 대통령 후보들이. 그래서 여기서 우리와 1년을 같이 살겠습니까? 하룻밤 가장 좋은 호텔에서 묵고 가도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이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나그네와 같이 하룻밤 이 땅에 머물다 떠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하룻밤 나그네아와 같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지내시다가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약 33년 동안이나 이 땅에 계셨습니다. 여러분 한 세대를 우리가 30년이라고 치잖아요. 한 세대 동안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이 담고 있는 의미에요. 영원전부터 존재하셨던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이 되셨고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한 세대를 사셨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부모들과 또 자녀들과 이렇게 가족들과 몇 대가 같이 사시는 가족들을 보면 참 부러운데요 여러분, 그 인생이 한 세대동안 같이 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길어야 한 세대죠.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또 자식들. 한 세대가 지나가면 또 다른 세대가 이제 올라오고 또 그 부모, 조부모 세대는 이제 이 땅을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요. 14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여러분 영광이라는 말 많이들 사용하시고 또 들으시잖아요. 영광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무게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무게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영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국적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무게인 것이죠. 영광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사람의 영광, 사람의 그 존귀함, 그 가치를 드러낼 만큼의 무거움이 바로 영광인데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무게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뭘까요? 아마 그분의 탁월하심을 말할 것입니다.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완전하심 또 우리의 존보자로서 우리의 고원자로서 행하신 그 사역에 완전하심, 또한 주님의 놀라우신 나자지심과 겸손이란 것들을 영광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보니까 요한이 1장 14절에서 결론으로 말하는 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욕신 사건을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의 성육신을 은혜와 진리라는 말로서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먼저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성육신은 참 놀라운 은혜이지 않습니까? 은혜인데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그런 은혜이고 또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데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는 성육신 사건에서 봅니다. 물론 일장을 이렇게 구절구절 이렇게 다 설명한다면 아마 몇 번의 설교로도 충분하지 않을 텐데요. 저는 이번 2023년 성탄절에 14절 말씀을 이렇게 설교하려고 이렇게 연구를 했는데 이 14절 말씀을 좀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1절 말씀과 14절 말씀을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장 14절 말씀을 함께 이렇게 읽어보면 14절 말씀의 그 의미가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1장 1절에 보면요.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라 되어 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인데 그 말씀이 이제 육신이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어떻게 되어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고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말씀이 이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또한 1장 1절에 보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14절에 보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여러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전도하십니까? 은혜와 진리가 출만하신 분이십니다.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표현해 줍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그 아버지 품속에 있는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18절에 보면요. 면봉 1장 18절에 보면 그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는데 원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아버지 품속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이죠. 항상 기뻐하고 항상 사랑하는 그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 아들은 다른 아들이 아니라 항상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그 아들인 거예요. 그 아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우리의 이성으로 다 측량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6절에 보면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로라. 은혜라고 하는 한 단어만으로는 이 성육신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요하는 은혜위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혜위의 은혜로라.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 설명이 있는데 은혜위의 은혜가 어떤 의미인가. 첫 번째 설명은 하나의 은혜를 더하여서 뒤따라오는 또 다른 은혜. 마치 파도가 한번 몰아치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또 파도가 밀려오잖아요. 하나의 은혜 위에 또 다른 은혜를 은혜 위에 은혜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 또 다른 설명은요 옛날에 받은 그 은혜를 보충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또 새로운 은혜 예전에 우리의 삶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새로운 은혜가 또 오는 것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이렇게 표현한다 설득력 있는 그런 설명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다른 설명은 이것은 성욕신의 은혜의 성격을 규정하는 의미다 라고 이렇게 설명하면서 공로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서만 주어지는 은혜다 그래서 은혜위의 은혜라 정말 우리의 자격과 공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갑없이 주시는 선물로만 받을 수 있는 은혜가 바로 은혜위의 은혜라라. 여러분, 이 14절 말씀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요. 제가 좋아하는 성경 9절인데요.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믿부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어떻게 이 엄청난 성경의 진리가 가능한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그는 밑부시고 으루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성유신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모든 인류를 대신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여러분 한국 정치 뉴스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접하실 줄을 압니다. 저도 정치가 하도 이제 논쟁으로 치닫게 되니까 잘 안 보려고 그렇게 하는데 안 보려고 해도 이렇게 보게 되는데 그 중에 좀 안타까운 것들이 좀 몇 가지 있어요. 이제 국민의 대표로 이렇게 선출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과거 이력들이 드러나잖아요.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대통령 후보든 그런데 수십 년 전에 지었던 그 죄가 막 들쳐져서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이 참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걸 보면서 세상은 참 이런 곳이구나 어제 지은 죄가 아닙니다 1년 전에 지은 죄가 아닙니다 20년, 30년 전에 지었던 죄라 할지라도 다시 떠들어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격을 박탈당하게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없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아닙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다른 많은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격 사유 때문에 후보로서 이렇게 사퇴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은 무서운 곳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 앞에 받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동의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를 믿으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용수해 주신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은혜인데 그래서 그것을 성경은 은혜 외 은혜다 라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짤막하게 진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고 오늘 설경을 마치려고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육신 사건을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진리라고 하는 말은 어떤 것을 담고 있습니까?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오 은혜와 진리는 예수 크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구약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압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게 주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거나 하나님의 자비의 하심을 드러내거나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드러내기에는 율법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 그리스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한복음 1장 18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월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하기 쉬운데요. 그리스도 송육신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신약시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그 지식과 비교해 볼 때 고약에서 송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보고 안 것은 정말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비천한 것이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추리국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강구하는데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강구합니다. 그때 모세의 요청이 수락되었죠. 추리국기 33장 22절부터 23절에 보면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진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드리니 내가 내 등을 볼 것이오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오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께서 얼굴이 아니라 등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등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죠. 그런 것과 예수 그리스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그 진리를 비교해 보면 고린도소 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빛이라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그 영광의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고약 최고의 선지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이 아닌 등만을 보았는데 예수 그리스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큰 진리의 빛을 봤습니까?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 찬양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데, 성탄절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우리는 요원복음 1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래서 요한은 은혜와 진리가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땅에 보내시면서 그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오늘 성탄 찬양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의 심령 가운데 충분하게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얼마나 초고만한 은혜인가를 여러분 생각하시면서 기뻐하시는 한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요. 또한 예수 그리스 안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진리를 개시하셨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의 복음 후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우리의 고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우리는 보금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신 진리이시며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길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성하시고 경배하시고 천국으로 침묘해 나아가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의 오심을 우리가 기뻐하면서 또 즐거워하면서 또 많은 찬양과 또 성경 말씀들을 읽으면서 그 의미들을 되새겨보았습니다. 부족한 종이 또 양보금 일장 말씀을 가지고 우리 주님의 성욕신의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그렇게 힘썼는데 하나님 심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일하여 주셔서 사랑하는 성도들의 신념 가운데 우리 주님의 이 땅의 오심의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알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어두운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 빛으로 충만하게 비춤을 받아서 슬픔이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소망과 위로와 또 감사함 가운데서 남은 삶들을 살아가도록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 안에서 죄 용수함을 받게 하신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를 우리의 신념 가운데 분명히 새기며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죄를 용서받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영상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남은 삶들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Identifiant du sermon | 123023190501432 |
Durée | 36:48 |
Date | |
Catégorie | Service du dimanche |
Texte biblique | Jean 1:9-18 |
Langue | coré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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